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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와 한국교회의 배교
수난의 모습
출옥성도


신사란 일본의 개국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를 비롯하여 역대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는 일본의 토착 종교인데, 이들을 숭배토록 강요한 사건이 신사참배 강요였다. 신사에는 역대천황은 물론, 다른 나라에는 해를 끼쳤을지언정 일본국에는 공을 세웠다고 여기는 전몰장병을 봉안하고 참배했다. 일제의 조선통치와 기독교 정책은 일관되게 ‘분할을 통한 다스림’이었고 신사참배도 그 일환으로 시행되었다. 특히 일본은 소위 ‘대동아 공영권 확보’라는 미명하에 침략전쟁을 감행하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1910년 한일합방 당시 일본거류민을 대상으로 31개의 신사를 세운 일본은 1925년에 신사제도의 총 본산인 조선신궁을 건립한 이래로 각처에 신사를 건립하였다.

1935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참배를 강요,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대대적인 탄압을 받으며 수난을 당하였다. 신사참배 강요는 기독교가 가장 흥왕했던 평양에서 시작, 식민 통치에 방해되는 기독교를 분열,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1937년 7월에 중ㆍ일 전쟁이 발발하자 9월 6일을 애국일로 정하고 일장기게양, 동방요배를 신사 참배와 함께 요구하였다. 그해 10월에는 황국신민서사를 제정하여 암송하게 했다. 미나미 총독 때는 ‘일면 일 신사정책을 수립하고 전국에 근로봉사대를 동원, 신사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일제가 종교계에 신사참배를 강요한 근본적인 목적은 종교적인 이유와 함께 한국인들을 친일화 하고 내선일체, 황민화 정책을 통하여 아시아 대륙에서 소위 ‘신동아건설’을 이룰 수 있는 중요한 정신통일의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한 일제는 한국인을 더욱 충실한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하여 신사참배를 의무화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침략전쟁을 훨씬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군국주의자들이 대일본제국을 건설하면서 곳곳에서 즐겨 사용한 전략이었다.
1932년 초부터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가 각 지역 기독교계 학교에서 문제가 되자, 1934년 장로회 총회는 총독에게 교섭하여 기독교학교에 신사참배를 요구하지 않도록 하였다. 특히 김선두 총회장(37-38년), 박관준 장로(39년) 등은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 정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신사참배 강요 저지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박관준 장로는 안이숙 여사와 함께 일본 제국회의장에서 종교법안 제정반대, 기독교 국교화, 신사참배 강요금지, 양심적 교역자 투옥 철폐 등의 내용을 담은 경고장을 뿌리기도 하였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애국적 교육정책의 기초로 삼고 학생들에게 이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이며, 예배행위가 아니고 조상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현혹하였다. 교육의 목적이 무엇보다 학생들로 하여금 천황의 신민이 되게 하는데 있었으므로, 교사, 학생들이 함께 신사참배를 통하여 천황을 숭배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기독교 학교들이 응하지 않자 사찰(?8)을 강화하였고, 총독부는 신사규칙을 개정하여 기독교 학교에 타격을 가하였다.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수용하지 않고는 기독교 학교를 운영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음을 깨닫고, 북장로교 선교실행위원회부터 시작하여 기독교 학교의 폐쇄를 결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교사들 사이의 이견으로 폐교 조치 외에 개인과 단체에 이양하는 방안도 강구하였다. 그 와중에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 학교들은 결국 자진 폐교하기에 이른다. 반세기 가까이 한국 근대 교육운동을 선도했을 뿐만 아니라, 복음전파의 매개체로 한국교회 건설에 크게 봉사해 온 기독교 학교들이 존립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교회가 본격적으로 신사참배 문제를 직면하게 된 것은 1931년 일제가 만주침략을 강행한 이후였다. 이때부터 기독교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경남노회는 1931년 4월 노회에서 이미 신사참배 문제를 논의하고 반대 의견을 표명했으나 신사참배에 대한 요구는 해마다 심화되었다.

일제는 교활하게도 다루기 쉬운 교파부터 회유와 협박으로 굴복시키기 시작했다. 가중되는 압력에 못 이겨 천주교와 개신교 각 교단들이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는 명분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1935년 12월 안식교단이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천주교는 1936년 교황청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신사참배에 동참하였다.

당시 소수였던 성결교단은 강압에 의해 교단이 해체되기도 했다. 장로교에서는 1938년 2월 전국에서 가장 교세가 큰 평북노회가 먼저 일제에 굴복하였고, 7월에는 신사참배에 협력한 각 교회와 단체들의 전국대회가 개최되었다. 9월 장로교 총회가 마침내 신사참배와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결의하고 말았다.

이를 전후하여 기독교계열 각종 연합단체는 해산되고, 세계조직으로부터 탈퇴하였고, 나아가 조선기독교는 일본기독교로 통합되는 비극까지 발생하였다.

일제 당국은 1938년 9월 장로교 총회를 앞두고 신사참배를 가장 강하게 반대해 온 장로교회를 굴복시킬 전략을 세웠다. 신의주에서 갖기로 한 총회 장소를 평양으로 변경하도록 압력을 가해 결국 평양 서문밖 교회로 바꾸는데 성공하였다.

일경은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하는 주기철, 채정민, 이기선 목사 등을 예비 검속하였다. 봄 노회에서 선출된 총대들은 참배를 지지하도록 일경의 협박을 받았다.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라고 투표하든지, 참석하더라도 신사참배문제에 대해서 침묵하든지, 아니면 총회에 참석을 하지 말든지 셋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했다. 선교사들은 총회에서 아예 발언하지 말 것을 요구받았다. 총독부는 각 지역 경찰서 형사들로 하여금 평복을 입고 총대들과 동행하도록 지시하였다.

1938년 제27회 총회는 이렇게 삼엄한 분위기에서 개회했고 의사( {v)는 친일파들의 각본대로 진행되었다. 한 총대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인정하자고 동의하자 재청을 받은 신임 총회장 홍택기는 즉시 '가'를 물었으나 '예'하고 대답하는 사람은 겨우 몇 사람뿐이었다. 선교사 방위량이 이의를 제기했으나 묵살되었고 총회장은 반대 의견은 묻지도 않은 채 황급히 가결을 선포하였다. 한부선 선교사가 ‘회장, 항의합니다’라고 외쳤으나 일경에 의해 회의장 밖으로 끌려 나갔다. 총회 후 부총회장인 김길창 목사를 비롯한 23명의 총대들이 각 노회를 대표하여 평양의 신사에 참배하는 역사적인 수치를 드러내었다.

- 서북지역의 신사참배 거부운동
신사참배에 끝까지 저항하고 신앙의 정절을 지킨 곳은 주로 서북지역인 평안도, 황해도와 경상남도 지역이었다. 이는 양 지역이 타 지역에 비해 신학적으로 보수성이 강했고 신앙생활도 철저하였기 때문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는 평양에서부터 한국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산정현교회를 중심으로 점진적인 항거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주목사는 4번에 걸친 옥중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감옥에서 1944년 4월 순교하고 말았다.

이기선 목사는 시무해 오던 교회를 사면하고 무임목사로 전국을 순회 전도하고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펴 나갔다. 신사참배 하는 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지 말 것, 신사불참배운동을 일으켜서 현실교회를 해체 시킬 것, 신사불참배 신도를 규합하여 가정예배를 가질 것 등을 지침으로 하여 신사불참배운동을 구체화시키며, 반대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 남부지역의 신사참배 거부운동
사실상 신사참배 항거운동의 중심지는 부산 경남지역이었고, 한상동, 주남선, 이인재, 조수옥, 최덕지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이들에 의해 경남지역에서는 강력한 항거운동이 일어났다. 경남지역의 거부운동 지도자들은 양성적이고도 조직적으로 반대운동을 벌여나갔다.

(1) 신사참배 하는 교회에는 출석하지 말 것
(2) 신사참배한 목사에게 성례 받지 말 것
(3) 신사 참배한 교회에 십일조 연보하지 말 것
(4) 신사참배하지 않는 교인들끼리 모여 예배하는 것을 행동원칙으로 삼았다.

한상동 목사는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평양에서 돌아온 이인재 전도사와 함께 경남 각지를 돌면서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지역별로 책임자를 세워 서로 협력하게 하였다. 지역간 협력 체제를 갖게 된 경남 지방에서는 더욱 강력하고 광범위한 신사 불 참배 운동을 위해
(1) 신사 불 참배주의 신도들만의 새 노회를 조직한다
(2) 신사 참배한 목사에게 세례 받지 않는다
(3) 신사 불 참배 동지의 상호원조를 도모한다
(4) 신사 불 참배 그룹의 가정예배와 기도회 확산, 동지 획득에 주력한다는 결의를 다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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