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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요약②

최고관리자 12-12-21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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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요약

 

요약/ 김흥식 연구원

 

2장 장로교 선교사들의 입국과 개척활동(1884-1906)

 

2.1.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입국

앞서 다루었듯이 한국 장로교 역사는 백홍준, 서상륜 같은 분들이 한국어로 번역된 복음서를 가지고 들어와 복음을 전함으로 이미 시작되었다. 이들의 전도로 예수를 믿은 자들은 목사가 없으므로 세례를 받지 못하여, 성례를 집행할 수 있는 선교사 목사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에 처음 온 선교사들의 활동은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는 이미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로 시작된 면이 있었다. 한국에 들어온 첫 번째 복음선교사였던 언더우드(元杜尤, H.G. Underwood)그 무렵은 씨를 뿌릴 시기였음에도, 동시에 우리는 첫 열매를 거둘 수 있었다.”고 했다. 한국에 처음으로 선교사를 보낸 미국 교회는 18세기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이 일어난 후에 선교에 대한 큰 관심과 뜨거운 열성을 갖게 되었다. 특별히 이 시기의 부흥운동이 미국 개신교의 특징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 장로교회는 1790년대부터 선교 조직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2.1.1.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입국(1885)

미북장로교(PCUSA) 선교부는 1884년 초에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기로 결의하고, 곧 의사 헤론과 언더우드를 한국 최초의 복음선교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한국 땅을 최초로 밟은 이는 알렌(Horace N. Allen, 安連, 1858-1932)이었다. 알렌은 1883년에 호하이오주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의료선교사로 임명되어 한국으로 오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그는 1884920일 제물포에 닿았고 22일에 서울에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서양 종교를 경계하여 서교 신자들을 사형에 처하는 법이 있었기에 미국 영상관 공의(公醫)와 영국, 청국, 일본 영사관과 세관의 공의로 봉사하면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였다.

그가 도착하고 두 달 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있었는데,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개화파 거사는 실패하였다. 하지만 민비의 사촌 민영익은 중상을 입게 되었는데, 세관에서 일하던 뮐렌도르프의 주선으로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하게 된다. 민영익은 알렌에게 10만량의 사례를 하고 고종황제의 어의로 임명하였다. 이때, 미국 대리공사 폴크(Foulk)가 조선 정부와 교섭하여 광혜원을 짓게 되었다. 후에 제중원이라 명칭이 바뀐 이 병원은 정부가 운영하는 왕립병원으로 운영되었다. 알렌과 조선 왕실과의 인영은 계속되었다. 그가 주한 서울주재 미 대리 공사와 총영사, 특명 대사 등을 역임하면서 명성황후시해사건 등의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기도 하여, 조선정부로부터 세 번이나 공로훈장을 받았다.

언더우드는 미혼으로 부활주일이었던 188545일 오후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언더우드는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 선교부로부터 직접 한국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파송되어 온 첫 복음 선교사였다. 영국 태생인 언더우드는 13세가 되던 1872년에 부모와 함께 미국에 이주하여 화란계 개혁교회에 속해 신앙생활을 했다. 그가 한국에 오던 1885년 당시 갑신정변의 영향으로 입국상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 그는 일본주재 미 선교사들과 함께 일본에 머물며 감리교 한국 선교사였던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두 달간 한국 문화와 언어를 익혔다. 이들은 이수정을 만나 한국어 마가복음을 받아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온 것이다. 아펜젤러 부부는 6월에 다시 들어오게 되지만, 언더우드는 알렌을 만나 광혜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된다.

그를 이어 미 북장로교회의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다. 18856월에 의료 선교사 헤론(J.W. Heron, 惠論)부부가 들어오고, 미 북장로교 한국선교부가 조직되었다. 이어서 여성 의료진으로 애니, 홀톤 양이 제중원에서 봉사하였다. 이어 1890, 모펫(Samuel A. Moffett, 馬布三悅), 1891년 베어드(W.M. Baird, 裵緯良)와 리(Graham Lee, 李吉咸), 1892년 스왈론 부부(W.L. Swallon, 蘇安論)가 입국하였다. 미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들은 개신교 선교사들 중 가장 먼저 한국에 들어와 선교기지를 정하고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2.1.2. 호주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입국(1889)

1889년 호주 장로교회(PCA)의 데이비스(J.H. Davis) 목사와 그의 여동생 매리 데이비스가 함께 서울에 도착했다. 그가 한국에 들어오게 된 경위는 우회적인 것이었다. 성공회 선교회에서 호주에 보낸 호소문이 선교지에 실렸는데, 이것을 본 데이비스와 그의 여동생이 한국에 오게 된 것이다. 그가 한국에 왔을 때는 이미 미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서울, 경기지방에 선교기지를 정해 봉사하고 있었으므로 부산에 선교할 뜻을 가지고 선교지 답사를 하였다. 하지만 그는 건강문제로 반 년만에 부산에서 소천하였다. 그의 죽음은 호주 장로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1891, 맥케이 복사 부부와 멘지스 양, 포세트 양, 페리 양 등 세 여성 독신 선교사들을 한국에 파송하였다. 그들 역시 부산 경남 지역을 선교 기지로 삼고 봉사하게 되었다.

 

2.1.3.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입국(1892)

미국 남 장로교회(PCUS)의 한국 선교는 북장로교회보다 8년 뒤에 시작되었다. 1891, 언더우드 목사가 첫 번째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돌아갔을 때, “해외선교를 위한 신학교 연합회의 강사로 참석했다. 이 호소에 큰 감명을 받은 남 장로교회에 소속된 메코믹 신학교의 신학생인 테이트, 유니온 신학교의 전킨, 레이놀즈가 남 장로교 선교부에 선교사로 갈 것을 자원하였다. 1892, 선교부는 한국 선교를 결정하고 이들과 테이트의 여동생 매티, 린니 데이비스 양 등을 첫 한국 선교사들로 임명, 파송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선교지역을 호남지방으로 정했다.

 

2.1.4. 캐나다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입국(1898)

캐나다 장로교회(PCC) 선교사가 개인자격으로 한구에 와서 선교를 시작한 것은 1888년이었다. 게일(James S. Gale)이 토론토 대학 기독청년회(YMCA)의 후원을 받아 188812월에 내한하였다. 그는 서울에 머물다가 황해도 해주에 정착하려 했지만, 여의치 못해 솔내로 옮겨 약 3개월을 지냈다. 그후 서울을 거쳐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1889년부터 1891년 봄까지 약 1년 반 동안 선교하였다. 이 해, 그는 토론토 대학 기독청년회와 관계를 끊고 미국 북장로교 본부 선교사로 일하게 되고, 1902년에 원산지방으로 옮겨 선교를 하게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한국에 온 선교사는 멕켄지(William J. Mckenzie, 1861-95) 목사였다. 그는 매리타임즈 지역 장로교학교 학생선교협회의 지원으로 189312월에 단신으로 내한하였다. 그도 황해도 장연의 솔내에 가서 한복을 입고, 한식을 먹으며 한국 사람과 똑같이 생활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게 되어, 1년 반 후인 1895623일 솔내 초가집에서 별세하였다. 당시 그의 사랑과 헌신의 생활은 마을 사람들에게 메시지가 되었다. 멕켄지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었고, 소래교회의 교인들은 그의 뒤를 이을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는 편지를 캐나다에 보냈다.

이에 캐나다 장로교회 총회는 1897107일 한국선교를 공식적으로 결정하고 서둘러 착수하였다. 선교부는 그리어슨(R.G. Grierson) 의사와 맥래(D.M. McRae) 목사, 푸트(W.R. Foote) 목사 세사람을 선교사로 임명하고 한국에 파송하였다. 이들은 189898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캐나다 선교사들은 함경 남북도를 중심하여 선교를 시작했고, 원산, 함흥, 요정 등에 선교기지를 두고 봉사했다.

 

2.1.5. 평가

1884년부터 1898년까지 미 남, 북 장로교회, 호주 장로교회, 캐나다 장로교회 등 네 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선교 활동을 하게 되었다. 영국, 스코틀란드 등 서구의 선교사들은 일찍부터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중국, 만주, 일본 등지에서 노력했으나 이들은 한국 땅 밖에서 한국인 개종자들을 얻고, 성경을 번역하여 한국에 들여 보내어 전도하는 등 한국 선교를 준비하고 터를 닦는 역할을 하였다. 한국에 실제 들어와 교회의 터를 놓고 교회를 세운 선교사들은 미주와 호주에서 온 장로교 선교사들이었다. 결과적으로 한국 장로교회는 서구의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전통보다 미주와 호주 장로교회의 영향 아래 터가 놓이고 성장하였다.

 

2.2. 선교사들의 초기 선교활동

 

2.2.1. 의료와 교육을 통한 선교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 18847월에 고종은 김옥균을 통해 한국에서 병원과 학교 사업을 시작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다. 이것은 조정의 합의나 문서로 된 것이 아니었고, 황제(광무개혁 후, 황제칭호 사용)의 사사로운 허락이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은 신문화를 갈망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선교사들은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선교하는 것을 매우 바람직하게 여겼다.

그 결과 선교사들이 가장 먼저 시작하게 된 것이 의료선교였다. 앞서 설명한대로 1884년 미 북장로교회 의료선교사 알렌이 미국 공사관 소속의사로 들어와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해 주므로 고종, 민비, 정부측의 신임을 크게 받게 되었다. 정부는 처형당한 홍영식의 집을 주어 광혜원을 설립하게 하였고, 의사 교육도 의뢰하였다. 이 병원은 왕립병원으로 운영되었지만 실상, 한국 선교의 전초기지가 된 것이다. 1885년 내한한 언더우드가 교사자격으로 이 병원에 머물면서 우리말을 배우고, 1885년 여름에 도착한 의료선교사 헤롼과 앨러즈 양도 여기서 사역했다. 광혜원은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1887년에 구리개(동현동)로 옮겼는데, 당시 진료를 받은 환자는 일 년에 만 명을 넘어섰다. 1894년 갑오경장 후 선교부는 정부에 병원의 단독경영을 청원하여 건물과 기지를 양도받고, 경영권을 이수하게 되었다. 후에 미국인 독지가 세브란스(I.H. Severance)가 건축기금을 제공함으로써 남대문 근처에 새 건물을 지어 1904년 개원하였다. 당시 세브란스 병원에는 무료로 진료를 받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고, 이러한 방법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발판을 삼았다.

또한 이 병원은 한국 최초의 의학교육기관이 되었고, 현대 고등교육기관의 효시가 되었다. 19087명의 첫 졸업생을 내어 한국 최초의 의사를 배출하였다. 의료선교는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도 자리를 잡게 되어 미 북 장로교 의로선교사 브라운, 어빈 등이 봉사하였다. 미 남장로교는 드류가 서울에서 오웬은 호남에서, 일골드는 전주에서 진료소를 열었다. 호주 장로교 선교부는 1902년 커럴을 파송하여 부산과 진주에서 병원을 열었다. 1892년까지 의료선교사와 복음선교사는 거의 같은 비율을 차지하였다.

의료선교와 함께 학교 교육도 도입되었다. 언더우드로 시작한 현대 교육은 평양의 숭실학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으로 이어졌다. 학교교육은 한국에 복음을 전하고, 근대화하는 방편이 되었다.

 

2.2.2. 성경의 번역간행과 문서를 통한 선교

만주와 일본의 구미(歐美) 선교사들은 미리 복음서들을 한국말로 간행하여 한국 권서인들을 통해 한국 사람들에게 전달하여 개종자를 얻었다. 성경의 번역과 반포는 한국선교를 위한 절대적인 방편이었다. 이들은 의료와 교육활동을 하면서 성경번역에 착수하게 되었다. 만주와 일본에서 번역된 쪽복음을 수정 출판한 것이다. 그 결과 1900년에 신약전서가 완역되었고, 1906년 공인본 신약전서가 출간되었다. 구약 번역은 신약에 비해 늦은 1900년에 시작되었다. 선교사들은 가용할 시간이 많지 않아 1907년 이눌서, 김장삼, 이승두 3인이 번역에만 몰두하여 3년 후인 1910, 구약 전체를 변역하였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선교사가 들어온지 26년만에 신구약 성경을 자기 언어로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구역성경”(舊譯聖經)이라 하고 1937년에 개역되어 나온 개역성경”(改譯聖經)이 있다. 성경에 이어 찬송가, 기독교교리, 전도문서들이 한글로 출간되었다. 1893년에 언더우드가 편집한 찬양가가 나왔고, 1895, (Graham Lee, 李吉咸) 목사와 기포드(M.H. Gifford) 부인의 공편으로 찬셩시가 출간되었다. 그러다가 1902년 장로교 공의회 결의로 찬셩시가 장로교회 공인 찬송가로 확정되었다.

1883, 만주 봉천에서 로스(J. Ross) 목사의 예수셩교문답예수 셩교요령이 출판되었는데 이것들이 초초의 교리문서들이었다.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 교회생활의 정착은 선교사상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만큼 빨랐다.

 

2.2.3. 순회전도(巡迴傳道)의 시작

언도우드가 한국에 도착한지 1년 남짓 후에 노도사라는 분을 첫신자로 얻게 되었다. 노도사는 종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언더우드의 사랑방 학교에 나오던 학생이었다. 노도사는 미 북장로교 선교부 선교의 첫 열매이자, 한국 개신교회 사상 한국 땅에서 처음 세례를 받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한국선교의 개척자로 선교의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여 서울뿐 아니라 전 한국을 포괄하는 순회전도를 시작하였다. 1886년 말 서상륜이 로스 목사의 소개 편지를 가지고 장연의 솔내로부터 그를 찾아와서 세례받기 원하는 사람이 있다하여 그의 내방을 요청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순회전도 사역이 시작된 것이다. 1889, 언더우드는 의사 호르튼(L. Horton)양과 혼인하여 서북도 순회전도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이런 언더우드의 방법은 새로 오는 선교사들의 본이 되었다.

 

2.2.4. 선교사들과 조정(朝廷)과의 관계

첫 선교사 알렌은 갑신정변을 지나면서 왕실과 밀접하게 지냈다. 뒤이어 온 언더우드도 알렌으로 말미암아 왕실과 좋은 관계를 맺고, 1888년 여의사로 한국에 온 호르톤 양이 왕후의 시의로 봉사하던 중, 언더우드와 혼인하여 선교사들과 왕실의 관계는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1893, 에비슨이 고종의 어의가 되므로 조정과의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1895년 민비가 시해당하고 큰 어려움이 있을 때, 고종은 외국 선교사들을 의지하였다. 고종은 언더우드를 가장 선호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고종은 한국을 둘러싼 일본, 중국, 러시아와의 국제 관계 속에서 미 선교사들과의 관계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구상하기도 하였다. 초기 선교사들과 조정과의 밀접한 관계와 선교사들이 왕과 왕비에 기울인 봉사는 기독교인들이 왕에게 충성하는 모습은 교회와 한국 국민들에게 본이 되었다. 그래서 한국 초대 교회 신자들은 자연히 일반인 보다 더욱 뚜렷하게 충군애국의 모습을 보였다. 교회는 경축일이나 주일마다 십자가와 태극기를 함께 게양하게 함으로써 애국의 모습을 보였다.

 

2.3.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

 

한국 초대 장로교회 선교사들은 대부분 보수적인 장로교 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성경의 축자영감을 믿은 청교도형의 개혁주의 신앙인들이었다. 미 북장로교 외지 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A.J. Brown)1911년까지 한국 초대 선교사들에 대해 나라가 개방된 이후 첫 25년간의 선교사는 전형적인 퓨리탄형의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1세기 전 그들의 조상들이 뉴 잉글랜드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안식일을 지켰으며, 춤이나 담배 그리고 카드놀이를 정죄하였다. 신학과 성경비평에 관해서는 철저히 보수적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전 천년의 견해를 진리로 보았다. 고등비평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으로 생각하였다고 하였다. 이런 초대선교사들의 입장은 한국교회에 복이었다.

하지만 허순길 박사는 중요한 점을 꼽는다. 초대 장로교 선교사들은 보수적 개혁주의의 소유자들이었지만, 감리교와의 교회일치운동에 동참한 것을 보아 보수라는 의미 외에 다른 큰 뜻이 없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그 시대의 미국적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2.3.1. 언더우드의 입장

언더우드는 한국의 첫 복음선교사로 한국 장로교 신앙생활 정착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보수주의자였으며, 근본주의자였다. 그러나 그의 교회관과 신앙생활을 보면 철저한 신앙고백적 개혁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처음 화란계 개혁교회에 속하였고, 뉴 부룬스웍(New Brunswick)의 화란계 개혁신학교를 졸업했으나, 신학교 시절부터 교회와 교리의 한계를 넘나드는 복음주의자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언더우드가 로마 천주교가 운영하는 기숙학교에서 천주교 참석을 강요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개신교 생활을 한 2년동안 관용의 정신을 배웠다고 하였다.

그는 신학교 재학시절 거리에서 전도하고 구세군과도 잘 어울렸다. 그는 개혁신학교를 졸업하고 장로교 선교부에 한국 선교사로 지망하여 자연스레 개혁교회에서 장로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그는 당시 선교부 총무 엘링우드(Dr. Ellingwood)에게 장로교를 전하기 위해 나를 한국에 보낸다면, 가기 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의 복음을 공포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가겠습니다고 하였다. 허순길 교수는 그를 교파를 싫어하는 일치주의자(Unionist)라고 평가하였다.

그가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하면서 그의 자세는 잘 나타났다. 19059월 장로교 네 선교부와 감리교 두 선교부가 같이 모여 재한 개신교 복음주의 선교 총공의회”(The General Couns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했을 때, 이들은 한국에 단일한 개신교 그리스도 교회가 세워져야 할 시기가 되었다고 보고 한국에 하나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지대한 공헌을 한 선교사가 언더우드였다. 1908년 출간된 그의 한국의 부름”(The Call of Korea)이라는 책도 한국에 하나의 일치된 그리스도교회”(One Unitied Christian Church)가 세워지기를 소원하는 말로 맺고 있다.

언더우드의 신학적 입장이 전통적인 개혁주의 입장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스코필드 관주 성경번역에서 기일과 함께 참여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이 두 선교사는 개혁주의와는 거리가 먼 세대주의와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보급했던 것이다. 그가 연희전문학교를 세울 때는 종교문제에 있어서는 중립을 지키고, “개정사립학교규칙에 순종하기로 하였다. 연희전문학교 설립멤버는 일제에 대해 유화적 태도를 가진 브라운(A.J. Brown)이 중심이된 선교 본부와 남북 감리교 선교부,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함께 이사회를 구성,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2.3.2. 미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

1) 맥코믹 신학교(McCoormick Theological Serminary) 출신들의 신학

한국에서 선교기지를 갯설한 미 남, 북 장로교 선교부, 호주 장로교 선교부,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 가운데 미 북장로교 선교부가 가장 먼저 자리잡았을뿐 아니라 선교사의 수도 가장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적, 신앙적 전통과 생활의 확립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1909, 한국 선교 기념 행사를 했던 북장로교 선교사 40명은 일곱 개의 각기 다른 신학교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프린스톤 출신 16, 맥코믹 출신 11, 칼리포니아의 샌 안세모 출신 4명 뉴욕 유니온 신학교 출신 3명이며, 나머지는 다른 신학교 출신이었다.

프린스톤과 맥코믹 출신이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다. 둘 가운데서도 맥코믹이 더 큰 영향을 주었다. 한국교회 초기에 목사 후보생 양성기관에서 봉사한 이들이 주로 맥코믹 신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모펫(Samuel A. Moffett)1893년 평양을 선교 기지로 정하고 정착한 후, 평양은 다른 지역보다 선교에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와 한국장로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1901년 평양신학교가 설립이 되고, 모펫은 이 학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1907년 교장이 되어 1924년까지 봉사하였다. 그렇기에 다른 학교보다 맥코믹 출신이 많았던 것이다. 교수로 5년 이상 봉사한 선교사는 모펫, (Graham Lee), 스왈른(Swallon, 蘚安論) 세 사람뿐이었다. 이들 모두 메코믹 신학교 출신이었다.

특히 스왈론은 15년간 기독교윤리와 신구약 주경학을 가르쳤다. 1902년 내한한 클라크(Charles Allen Clark, 郭安連)도 멕코믹 출신으로 1908년부터 평양신학교에 가르치기 시작하여 1922년에 전임이 되어 평생 목회학, 설교학을 담당, 한국어로 50, 영어로 6권의 저서를 내었다. 그래서 평양신학교는 한국의 맥코믹 신학교라 불릴만큼 되었다. 초기 신학 교육에 프린스톤 출신이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프린스톤 출신들은 1925년 로버트 선교사가 모펫을 이어 신학교 교장이 되면서 주축을 이루게 되었고, 어드만, 해밀톤 등이 교수로 봉사했다. 그러나 이들의 영향은 맥코믹 출신들의 영향과 비교할 수 없었다. 맥코믹 신학교는 1929년 이전 프린스톤과 달리 신앙고백과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맥코믹 신학교에서는 무디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광범한 신학적 문화를 강조하였고, YMCA 학생영역의 신학분과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이 학교에서 신학훈련을 받은 분들은 초교파적 복음주의적 입장을 취한 것이다. 스왈른은 교회일치위원회 회장으로 있을 때, ”한국에서 감리교와 장로교가 그 교리의 조화를 찾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들의 복음주의는 알미니안주의를 포함하고 있었다. 북 장로교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고백적 개혁주의자들은 아니었고, 전형적인 미 복음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전한 복음주의자, 근본주의자들이었으나, 개혁주의 교리(신앙고백)를 중요시하고 파수하는 것에는 미진하였다.

1909년 당시 안수 받지 않은 선교사가 의료선교사를 포함 74명이 있었는데, 이들 상당수가 성경학교 출신으로, 무디성경학교 출신이 가장 많았다. 결과적으로 한국 장로교회는 신앙고백에 기반을 둔 정체성을 갖기보다 미국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2) 19세기 하반기 미북장로교회 안에 자리잡은 교리적 포용주의(inclusivism)

미국 장로교회는 19세기 초부터 순수 장로교회가 아닌 교회(회중교회)와 통합을 함으로써 이질적인 요소의 유입을 허용하고, 다시 분열과 통합의 과정을 겪는 동안 교리적 포용주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1801, 장로교 총회와 코네티컷 회중교회연합회사이에 통합계획”(The Plan of Union)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회중교회는 장로교회 안에 들어와 용해되지 않았다. 어떤 교회들은 당회가 아닌 위원회를 통해 치리하였다. 위원들이 설 때에도 신앙고백을 준수하기로 하는 서약하는 일들이 없게 되었다. 장로가 아닌 위원들이 노회 등의 치리회에 총대로 참석하게 되었다. 결국 장로회중체제”(Presbygational System) 혹은 회중장로회체제)(Congreterial System)라는 이상한 정치체제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통합을 통해 양적으로 증가하였으나 장로교 원리로부터는 멀어졌고, 교회 내에는 다툼이 생겼다.

1837-1838년 동안 장로교회는 신구 양 학파가 분열하는 어려운 때를 지내게 된다. 자로교회는 뉴 잉글랜드의 회중교회들에 의해 위험한 사색적 신학(Speculative theology)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 것이다. 회중교회의 목사들이 장로교회에 초빙되어 목회를 하게 되므로 긴장과 분열이 생기게 되었다.

소위 구학파(The Old School)은 장로교 신앙고백을 성경에 계시된 교리의 체계로 믿었고, 장로교 정치원리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신학파(The New School)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리의 요지로만 받아들이고 교회정치면에서는 뉴잉글랜드의 회중교회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1834-36, 신학파가 다수를 차지했을 시절에 인간의 원죄를 부인하는 바네스(Albert Barnes)의 교리적 오류를 관용하기에 이르렀다. 회중교회와의 통합으로 미국 장로교회는 위기를 맞은 것이다.

이 즈음 프린스톤 신학교는 구파에 동의하면서도 표면적 중립을 지키고 침묵하고 있었다. 신학파가 득세한 1836년에서야 프린스톤 교수들이 학교자체의 위기감을 느끼고 구학파에 가시하고 나서게 된 것이다. 구학파 측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프린스톤 신학교를 배제하고 다른 신학교를 새우려는 움직임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프린스톤 최초 교수인 알렉산드(Archibald Alexander)와 밀러(Samuel Miller)가 구학파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다.

전세가 역전되어 1837, 총회에서 구학파가 다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구학파는 장로교의 신앙고백적, 정치적 정체를 찾는 최선의 길은 양측이 갈라서는 것이라 판단, 평화적인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이 결의하지 못하자, 1801년의 회중교회와의 통합계획폐기안을 제출하여 투표하여 가결하였다. 다음 총회에서 구학파 중심의 총회가 신학파에 속한 교회들의 총대들을 수용하지 않자, 1838년 신학파에 속한 교회들이 자기편 총회를 따로 조직하게 되므로 미 장로교회가 분열하였다.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전정이 5년간 계속되는 동안 북미의 교회생활은 큰 변화가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던 해 미 남부지방에 있는 구학파 교회들이 총회에서 분리되어 남미 장로교회를 조직했던 것이다. 새로 조직된 장로교회의 명칭은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였다. 남부가 패배한 후에는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라 하였다. 남북전쟁 후, 북부지방의 신구 양 학파는 지난 과거를 잊고 1869년 다시 통합하였다. 통합된 후 20년 후인, 1889년 교리적 포용주의적 분위기 하에서 웨스트민스터 교리 표준을 수정하자는 건의가 있었지만 당시 프린스톤의 강한 반대로 인해 부결되었다. 하지만 포용주의자들은 1900년에 다시 건의하여 190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예정에 관한 내용을 수정하고, 34성령에 관하여”, 35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두 장을 첨가하게 되었다. 이 두 장의 내용은 제한적 구속과 효과적인 부르심에 대한 개혁주의 교리를 피해간 것이었다. (고신교단은 현재 1903년에 채택된 북장로교의 신앙고백의 영향을 받아 신앙고백 표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로서 미 장로교회는 아르미니안적 교리를 가진 교회에도 만족을 주었다. 1920년대에 현대주의 세력이 미 북장로교회 안에 지배적으로 되었다. 지난 100년 전통을 지켜오던 프린스톤 신학교도 1929년에 현대주의 신학교로 개편되었다. 그리하여 북 장로교회 안에서 다시 분열하여 1936년 미 정통장로교회가 생겼다.

 

2.4.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정책

 

2.4.1. 네비우스(Nevius) 방법의 도입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대부분 선교의 경험이 없는 30대 미만의 젊은이들이었다. 1885년 당시 알렌 27, 언더우드 26, 헤론 29, 1890년에 입국한 모펫 26, 1888년에 입국한 게일 25세였다. 이들은 실제 경험이 없어 선교 방법에 있어 상당한 갈등이 있기도 하였다. 그래서 언더우드는 선교 경험이 있는 분을 파송해달라는 요청을 선교부에 하기도 하였다.

이런 형편 가운데 1890년 중국 지푸에서 선교하던 네비우스(John Nevius)를 초청해서 2주 동안 함께 지내며, 앞으로 한국 선교사들이 실천해야 할 선교방법의 원칙에 관하여 듣게 되었다. 네비우스는 북 장로교회 소속으로 중국 선교를 위해 30년 넘게 일한 노련한 선교사였다. 한국 선교사들이 그를 초청하게 된 동기는 선교교회의 기획과 발전이라는 그의 저서를 읽은 것이었다. 네비우스가 제시한 선교의 원리는 선교지 교회의 자립을 강조한 것이었는데, 언더우드는 다음 4개항으로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정리했다.

 

1) 각자가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형편에 거하게하여, 각 개인이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되어 자기 이웃들 속에 살고, 스스로 생업을 꾸려 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가르친다.

2) 교회의 운영방법이나 조직을 토착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발전시킨다.

3) 교회 스스로가 가능한한 인력과 재정을 공급하게 하여 이웃 속에서 복음 사역을 하게 하되, 자질이 좀 더 나은 사람을 훈련시켜 복음 전도 사역을 하게 한다.

4) 본토인들로 자기네 교회당 건물을 마련하게 하되, 그 건물은 토착적인 것이어야 하고, 그 지역 교회가 능히 꾸밀 수 있는 양식으로 지어야 한다.

 

네비우스로부터 감명을 받은 주한 선교사들은 이 원리를 한국 선교에 적용하기 위하여 연구하고, 장로교회 선교공의회에서는 이를 구체화하여 선교에 임했다. 네비우스 정책의 기본이념은 3S, 자진전도(Self-propagation), 자력운영(Self-support), 자주치리(Self-government)였다. 주한 장로교 선교회의 선교 정책은 네비우스 방법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 정책은 시행과정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교회전도자 양성 문제에서 함께 일해야 할 사람들보다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우려가 있는 훈련을 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것보다는 자급자치를 통해 서양화를 방지하고 한국토착교회 건설을 위한 점은 매우 긍정적인 것이었다.

 

2.4.2. 선교지의 분할

1885년 미 북장로교 선교사와 미 감리교 선교사가 같은날 입국한 뒤를 이어 호주 장로교회(1889), 미 남장로교회(1892), 캐나다 장로교회(1898) 선교사들이 내한하게 되었고, 이어 각 교단 선교사들이 계속 파송되어 들어오게 되었다. 여러 선교회는 서로의 마찰과 사업의 중첩을 피하고, 돈과 시간과 힘의 낭비를 줄이기 위해 상호협의를 하게 되었다. 1893장로교 정치체제를 쓰는 선교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조직하게 되었다. 처음 이 공의회는 선교에 대한 협의체였으나, 1901년 한국인들이 공의회에 참석하게 되자 정치적 권한까지 행사하게 되어 1907년 독노회가 설립되기까지 한국 장로교회를 다스리는 실질적인 정치기구 역할을 했다.

1893년 선교공의회는 이미 장로교 각 선교부 간의 선교지 조정 협의를 했다. 이들이 모두 장로교회에 속했지만 파송한 교회들이 서로 달랐기 떄문이다. 북장로교 선교부는 서울과 관서 지방, 남장로교 선교부는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 호주 장로교 선교부와 북장로교 선교부는 함께 부산 지역에서 선교하고 경남지역, 낙동강 이남은 호주 선교부가 이북은 북장로교 선교부가 담당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914년 재협의를 거쳐 부산을 위시한 경남 전지역을 호주 장로교 선교회가 맡기로 하였다. 허순길 박사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예양협정을 다루면서 이만열의 입장을 논박한다. 허 박사는 이만열의 민족사적 입장, 특히 미국 교회의 선교지 분할 점거의 관점이 제국주의적인 점을 비판한 것이다.

이러한 예양협정 가운데 한국 신자들과의 마찰도 있었다. 장로교, 감리교의 협정으로 인해 한국인 신자가 다른 교단에 편입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역분할의 배후에는 교회의 역사와 교리를 중요시하지 않는 미 복음주의적 영향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2.5. 교회의 형성과 초기의 교회생활

 

2.5.1. 한국 초기 신앙공동체의 형성

만주와 일본에서 회심한 한국인을 통해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의주와 솔내에 신앙공동체가 이루어졌다. 만주에도 권서인과 전도자들은 복음을 전했다. 188411월에는 로스와 웹스터가 이곳 4개 마을 75명의 남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1883년 이수정이 세례를 받으며 동경에도 신앙공동체가 이루어졌다.

1886년 언더우드가 노도사에게 세례를 준 이후 1886년 솔내의 서상륜이 와서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요청하여 솔내의 교인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모두 성경을 읽고 회심한 자들이었다. 한국 선교의 시작은 매우 이례적이었던 것이다.

1887, 서울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 목사 집에서 14명의 세례교인이 모여 조직교회가 설립되는 역사적인 사건이있었다. 정동교회는 오늘의 새문안 교회의 전신이었다. 14명 가운데 13명도 선교사의 전도가 아닌 서상륜을 통해 믿게 된 사람들이었다. 언더우드는 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사실을 밝혔다. 만주서 로스 목사로부터 복음을 접한 서상륜이 장로로 장립되고 이로 말미암아 장로교회가 탄생된 것이다. 한국 최초 장로교회 설립에배에는 만주에서 한국교회의 터를 놓는데 쓰임받은 스코틀란드 장로교 선교사 로스도 초대를 받아 참석하였다. 교회는 빠르게 성장하여 1888년 말 세례교인이 65명에 이르게 되었다.

 

2.5.2. 초대 한국교회의 생활

1) 성경과 성례

한국 개신교는 성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로마 천주교와 대조되는 것이다. 한국과 접촉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모두 성경 반포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귀츨라프 목사나 토마스 목사도 한국 해안에서 성경을 반포했다. 만주에서는 로스와 맥킨타이어 목사, 일본에서는 루미스와 낙스 목사가 성경을 번역하여 한국에 보냈다. 그래서 언더우드가 들어올 때, 이미 한국어 성경을 가지고 온 것이다. 개신교 장로교회의 최초 신자인 백홍준, 서상륜 등은 권서인으로 성경을 반포하며 전도하였다. 농한기에는 일주일씩 함께 성경을 읽고, 가르치고, 배우는 사경회가 시작되었다. 사경회는 삼 일, 한 주, 혹은 두 주간 진행되었다. 사경회 참석인원은 적은 때도 있었으나 어떤 때는 수백, 천 명을 넘는 일도 있었다. 사경회는 성경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여기서는 성경이 유일한 교과서였고, 교회지도자, 장로, 젊은이들이 공부하였다. 성경 공부와 사경회는 한국 교회의 독특하고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성례에 대해서 다른 양상을 보여줬다. 세례는 성실하게 베풀었으나 성찬에 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18851011일에 한국에서 첫 성찬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선교사들만 참여한 것이었고, 한국인은 한 명도 없었다. 한국인의 성찬 참여는 1887년에 언더우드 목사의 집에서 있었다. 이는 한국인이 최초로 세례를 받은지 8년이 지난 때, 한글성경이 번역되고 5년 후였다. 이러한 성례에 대한 소극적인 생활은 한국교회생활의 전통이 되었다. 미국 부흥운동의 여파로 성례보다는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와 체험에 더 강조를 두는 미국 개신교계의 일반적인 복음주의적 경향이 한국에 그대로 미친 것이다. 이것은 성례를 가견적 말씀(Visible Word)의 선포로 믿는 개혁주의 신앙생활의 전통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2) 생활의 갱신

한국 초대교회 신자들은 오랫동안 젖어 있던 미신적인 구습을 과감하게 청산하여 변화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미신과 우상숭배가 있었다. 신자들은 그 폐습을 직시하였다. 무당이나 박수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일도 많았다. 당시 교회는 미신의 폐해를 설명하여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을 열심히 하였다. 그래서 사회를 정화해 나갔다.

교회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술과 담배를 금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운동 처음부터 술과 담배가 죄가 되는 이유는 아니었다. 이것들이 바른 생활과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었다. 신자가 된 후, 술을 끊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예수교는 참 사람을 고치는 교()”라고 평하게 되었다. 술은 낭비와 인간성의 변질을 가져 오므로 없어져야 할 것이었다. 교회가 금주, 금연을 주장하면서도 약 1900년경까지는 이를 허용하였고, 1900년도 들어서면서 성경적인 근거를 찾아 금하게 되었다. 이후 장로교회는 술 취한 사람들에게 권징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 권징은 장로회 제5회 총회(1916) 이후 볼 수 있다.

 

3) 반상(班常)의 타파

19세기말 개화의 물결이 일면서 오랫동안 한국 민족사회 속에 자리 잡아온 양반, 상민 계급의식이 차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조정도 1894년에 이에 대한 타파를 공포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시행은 쉽지 않았다. 계급을 타파하고 사회변혁을 일으킨 평등운동에 앞장 선 것은 교회였다. 열정적으로 나선 인물이 미 북장로교 선교사 무어(Samuel F. Moore, 1860-1906)였다. 그는 서울 곤단골에 사는 백정 박씨를 전도한 후, 평등운동에 나선 것이다. 또한 교회는 반상 타파를 기도하였다. 평등운동에 앞장 선 교회에는 많은 천민 출신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물론 교회 안에서도 계급간의 상호 수용과 이해는 쉽지 않았다. 백정들 자신의 도덕적 변화도 요구되었지만, 양반 출신 신자들의 의식도 변해야 하였다. 곤당골 교회에 백정 교인이 6명이 되자, 양반이었던 대부분의 교인이 그 교회에 나오지 않고 분립하여 세운 교회가 승동교회였다. 교회는 계속해서 반상타파를 위해 힘썼고, 사람들은 이런 교회에 관심을 가졌다.

 

4) 여성의 지위 신장

교회로 말미암아 여성의 지위에 변화가 왔다. 여의사 엘러즈 양이 1886년 북장로교회 선교회 소속 여의사로 내한하여 제중원의 부인과를 설립하고 왕후의 시의가 되어 활동하면서부터이다. 여의사로서 한국에 와서 여러 층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봉사한 것이 한국 여성의 지위의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헤론 부인을 비롯한 여러 선교사 부인들은 성경반을 만들어 여성을 가르치고 믿음으로 인도했다. 장로교회에서 최초의 여자 세례는 1888년에 있었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러한 활동으로 여성 신자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1892년에 여성들이 전도에 나섰고, 성경반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한국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신장된 것이다. 성경을 배우며 하나님꼐서 남녀를 모두 그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진리를 알게되어 남녀 모두의 인격을 존중해야 할 것을 배우게 된 것이다. 1898년에 정로교의 여자 전도회가 평양 판동교회에서 처음 조직되었다. 지방 순회 전도에도 선교사들보다 이들이 앞장섰다. 여신도들은 헌금과 헌신, 다양한 활동을 통해 교회에 크게 봉사하였다. 또한 혼인 문화에서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켰다. 1908년 독노회는 소실(小室)이 있는 자에게 학습, 수세 자격을 주지 않기로 했고, 1910년에는 데릴사위나 민며느리를 들이는 교인을 경계하기로 했다. 1914년에는 조혼의 폐를 없애기 위해 남자 만17, 여자 만15세 이상이 될 때, 혼인하게 하였다. 한국에서 여성의 위치는 점차 개선되었다. 1913년 총회에서는 예배당 사이에 남녀 사이의 휘장을 걷는 문제가 상정되어, “아직 모여 예배하는데 무례할까 조심되는 일이니, 각기 형편대로 조심하여 할 일이라고 결의하기도 하였다.

 

5) 교회의 수난

한국 개신교회 선교는 의료선교사 알렌과 왕실과의 밀접한 관계에서 터를 잡아나갔다. 알렌의 뒤를 따라 입국한 선교사들은 왕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서양의 종교를 배척하는 수구세력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종종 어려움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18884월에 갑자기 전도 금지령이 내린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는 당시 로마 천주교에서 1887년 서울 시내, 높은 지대에 비밀리에 대지(지금의 명동성당)를 구입하고, 왕궁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위치에다 성당을 짓게 된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당시 고종은 건축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지만, 강행되었다. 전도 금지령이 내리자 미국 공사는 벽지에 전도 여행 중인 언더우드를 돌아오게 하였다.

18886, 소위 영아소동(Baby Riots)이 일어났는데, 이는 외국공사들과 선교사들이 한국 어린아이들을 유괴하고, 식탁의 별미로 사용한다는 유언비어에서 시작된 일종의 폭력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외국인 선교사와 외국인 선교사의 기관에 일하는 한국인들은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1894, 평양기독교인 박해사건도 있었다. 덕천부사 신덕균과 김호영은 선교사를 내쫓고, 교인들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이들은 평안도 관찰서 민병석으로 하여금 조선교인을 잡아 난타하고 강금하게 하였다. 18991, 황주에서 큰 환란이 있었다. 이길함 목사가 순회 전도 중에 있었는데, 관리가 나와 교회를 파괴하고, 교인들을 난타하였으며, 이 목사의 책을 태우고 현금을 빼앗은 것이다. 또한 1900년대 서울의 전차(電車) 부설을 둘러싸고 국내 선교사와 신자들이 살육당할 위기도 있었다.

개신교 신자들은 개인적으로도 신앙 때문에 여러 가지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가족과 동네에서 소외되었고, 신자가 된 이후 저축한 재산을 강탈당하기도 하였다. 농사를 그르치기도 했으며, 제사에 참여하지 않아 족보에서 제명되기도 하였다. 어떤 여신도는 가족의 구타로 상처를 입고 머리카락이 없을 정도로 수난을 받았다.

한국 초대 개신교의 수난은 로마천주교로부터도 왔다. 로마천주교는 일찍부터 정치적으로 고압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선교의 문을 열려했기 때문에 한국 조정과 국민으로부터 부정적인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개신교는 로마천주교와의 역사적인 관계를 부인하고, 반 로마천주교적인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일찍이 초기 선교사들도 로마천주교를 배격하였다. 토마스, 로스, 알렌, 언더우드 모두는 반()로마천주교적인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로마천주교 측에서 개신교회에 박해를 가했다. 1898, 항내동 교인들이 예배당을 건축하는데, 백 여명의 로마 교인들이 예배당을 공동 사용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받아드리지 않자 건축을 방해하였다. 1900년에는 신환포 로마천주교인들이 성당 건축을 위해 개신교도들에게 부역과 헌금을 강요하고, 이에 불응하는 교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자기교회당으로 끌고 가서 기둥에 매어 달고 매로 치기까지 하였다. 이와 유사한 박해들이 황해도 여러 지방에서 일어났다. 이런 만행을 한 자 중 15명은 고종의 명으로 잡혀와 재판을 받고 실형 선고를 받게 되었다.

 

6) 초대교회의 성장

1892,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채용하고, 전도대상을 근로계층과 부녀자를 대상으로 삼은 점에서 초대교회의 선교정책은 식자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것과는 달랐다. 이러한 점도 선교 성공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지만, 교회 급성장의 가장 큰 요인은 당시 한국이 맞은 위기였다. 19세기 말, 조정에서는 동아시아 침략세력에 자주적인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이 땅을 저들의 전쟁터로 내주고 말았다. 또한 일제는 한국에 대한 식민화 작업을 진행해 갔다. 이런 가운데 백성들은 의지할 곳을 잃고 자연히 생명과 재산의 보호를 받을 곳을 찾게 되었는데, 그곳이 교회였다.

1889년까지 약 5년간 장로교, 감리교 양 선교사들에 의해 개종된 사람들은 겨우 백 명을 넘어서는 정도였다. 이후 개종자의 수는 완만하게 증가되어가다가 한민족의 수난기에 수가 급격히 늘기 시작하였다. 1894-95,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1904-5, 노일전쟁이 일어났다. 1895180명이었던 장로교회 세례 교인의 수가 청일전쟁을 겪은 후인 18962000명으로 증가하였다. 노일전쟁을 지나면서, 1905, 8431명의 장로교회의 세례교인은 1906, 12161명으로 증가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교회로 오게 된 것이다.

청일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평양이었다. 이 때, 교회는 피난민 수용소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방으로 피난갈 때, 평양의 교인들은 예배당에 모여 주님의 보호를 빌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재물을 예배당에 두었다. 당시 예배당은 외국인 소유로 인식되어, 치외법권적인 영역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 신앙이 확고해지고, 피난을 위해 지방으로 흩어진 이들이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함으로 많은 곳에 교회가 개척되고 신자의 수가 급격히 늘었다. 이때부터 서북지방은 한국에서 기독교 신자의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으로, 한국교회의 중심이 되어갔다.

평양은 1893년 모펫과 그래함 목사가 선교기지를 삼고 정착한 곳이다. 처음에는 주민들이 복음을 잘 받아드리지 않다가 청일전쟁이후 급속하게 신자가 증가하여, 1899년 세례교인 1182, 학습교인 7433명이 생기게 된 것이다. 평양 정착 후, 6년만에 거의 일만 명에 이르는 개종자들을 얻게 된 것이다. 1905, 평양은 19명의 선교사 사역으로 세례교인 5468, 학습교인 10744, 16230명으로, 초기 선교 10년 동안 5만의 평양 시민의 3분의 1이 개종하게 된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것이다. 이런한 부흥의 요인에는 헌신적인 의료사역, 사회의 부패 척결, 민족주의자들의 개종과 양반 지식층의 개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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