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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요약①

최고관리자 12-12-13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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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요약

 

요약/ 김흥식 연구원

 

1장 개신교 한국 선교의 태동

 

1.1.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

허순길 박사는 한국이 개신교를 접할 때,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를 다섯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19세기 한국은 종교적으로 공백상태였는데, 삼국시대 이후 불교와 유교가 문화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 둘 모두 인간 영혼의 내적 요구를 채워줄 수 없어 쇠잔해졌다. 둘째, 오랫동안의 로마 천주교의 수난역사(1791-1866)가 한 민족에게 서양 종교의 우월함에 대한 가치의식을 암암리에 심어주었다. 셋째, 은둔의 나라로 불려온 나라가 정치적으로 문호를 개방해야 할 때를 맞은 것이다. 넷째, 문호개방시의 역사의 진행이 개신교의 수용에 매우 유리했다. 이 말은 다른 아아제국(asia-africa)과는 달리 소위 기독교 국가의 침략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정교 분리의 미국 선교사에게 받아들인 복음은 국권 회복의 동력으로 여겼다. 다섯째, 한말의 국가적 무능과 관리들의 무서운 부패가 백성들로 하여금 의지할 만한 곳이 없게 만들었던 것을 들 수 있다.

 

1.2. 은둔(隱遁)의 나라 조선에 대한 선교의 시도

17세기 초반에 한국에 온 서구의 기독교 신자들이 있었다. 1627, 일본을 향해 항해를 하다 폭풍을 만나 표류하던 중 담수(潭水)를 얻기 위해 경주에 상륙했다 붙들려 한국에 머물게 된 벨트프레이(Jan Janse Weltvree)이다.

1653년에는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을 포함한 화란인 일행은 일본을 향해 가다 표류하게 되어 28명은 익사하였고, 하멜을 포함 36명은 제주도 해변에 닿았다. 이 중 15인이 일본으로 도망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때 하멜이 지은 책이 표류기이다. 서구에 한국의 존재를 처음 소개하게 되었다.

한국에 들린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는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였다. 그는 독일 할레 대학에서 신학을 수학한 화란 선교협회 파송을 받은 선교사였다. 그는 중국 선교를 하던 중, 조선 서해안에 전도여행의 기회를 갖게 되어 1832, 7-8월경에 백령도와 고대도에서 성경을 나누어 주고, 의약을 주어 병을 고치고, 전도의 길을 열기 위해 노력했다. 귀츠라파 일행이 한국 해안에 머문 것은 한 달 남짓 했다.

이후, 한국 선교를 위해 온 선교사가 토마스(Roert Jermain Thomas) 목사였다. 그는 한국 선교를 위해 제너럴 셔먼호에 통역을 위해 동승하였다. 하지만 셔먼호에 편승하여 자신의 일터를 이탈한 그의 판단에 대해 런던 선교부는 조심스럽게 유감을 표하고 있다. 셔먼호는 상선이라고 하지만 중무장하고 있었으며, 선교부는 토마스가 북경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통보한 상황이었다. 1866, 셔먼호는 조선군과 교전하였고, 결국 토마스는 양각도 옆, 쑥섬에서 27세의 나이로 순교하게 되었다. 토마스 목사는 회중교회 목사였지만 한국장로교회는 그를 한국에 온 첫 번째 장로교 목사로 기록하고, 192716회 총회에서 토마스 목사 기념사업을 하기로 하였다. 1894, 미북장로교 선교사 모펫(S. A. Moffet, 마포삼열) 목사는 평양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성경 교리반에서 토마스 목사가 전해준 성경을 받은 자의 아들을 만났다.

1882,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고, 1884년 미국 선교사 알렌(H.N. Allen)이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1.3. 나라 밖에서의 조선말 성경번역과 반포를 통한 선교활동

19세기말, 만주에서는 스코틀란드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의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0년대까지는 대영제국의 교회가 미국의 교회보다 세계에 선교사를 더 많이 보내고 많은 선교비를 지출했지만, 1914년부터는 미국의 개신교가 대영제국의 교회보다 선교에 더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1870년대 중국과 만주지역에는 영국, 스코틀란드 선교사들이 많이 와서 봉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의 정치적, 사회적 형편을 고려하여 직접 복음을 전하는 일이 매우 어려운 일로 판단했다. 그래서 먼저 성경을 조선말로 번역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은 중국에 주재하고 있으면서 조선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문 성경을 한국에 보급하는 일을 감당했다. 그는 토마스 목사에게 한문 성경을 주어 조선에 반포하게 하기도 하였다. 그는 18664, 요동지역에서 한국인 상인들과 여행자들을 만나 진리의 말씀과 서적들을 나누어주고 전도의 기회를 갖기도 했다.

존 로스(John Ross) 목사는 성경을 조선말로 번역하고 권서인(勸書人)을 파송하여 조선 선교에 위대한 공헌을 하였다. 존 로스는 그의 자형, 맥킨타이어(John MacIntire)에 이어 18728월에 만주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왔다. 그는 중국어와 만주어를 습득하였고, 윌리암슨 목사로부터 토마스 목사의 순교 소식을 듣고 조선 선교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조선의 국경마을인 고려문(高麗門)에서 한문 성경을 팔고 전도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백홍준의 아버지를 만나 조선의 정세를 듣고, 조선어 발음을 배우고, 한문 성경을 그에게 건네 주었다. 로스는 조선어로 된 성경을 번역하기 원했다. 조선어 교사를 찾기 위해 노력하던 중, 의주에서 올라온 이응찬,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네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서구의 지식을 원헀고, 결국 이응찬이 로스의 어학 선생이 되기 원했다. 로스 목사와 함께 봉천에서 생활하였다. 로스는 조선의 글자는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완전한 문자라 하며 경탄했다. 그리고 이응찬은 다시 고려문에 와서 세 친구들을 만나 우장에서 서양 선교사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면서 서양문화를 배우던 중 예수를 믿게 되었다.

로스 목사는 이들과 함께 성경번역에 착수하였고, 1878년 봄, 요한복음과 누가복음 번역을 마치게 되었다. 1879, 백홍준, 이응찬을 포함한 네 명의 젊은 지성인은 맥킨타이어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한국에 첫 장로교 선교사가 들어오기 5년 전의 일이다. 같은 해 로스는 서상륜과 그의 동생 서경조를 만났다. 당시 서상륜은 장질부사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맥킨타이어 목사가 그를 서양인 병원에 소개하여 낫게 되었다. 그는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되고, 1881년 세례를 받았으며, 로스 목사에게 소개되어 성경 번역하는 일을 돕게 되었다. 그는 열심과 재간이 있어 목판을 깎아 내어 인쇄하는 일도 했다. 그 결과 1882년 가을, 심양 문광서원 간행으로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예수성교 요안내 복음전서라는 쪽 복음서를 내 놓을 수 있었다. 그는 앞서 복음을 접한 자들보다 3년 정도 늦었지만, 그의 신앙인격은 누구보다 진지했다. 로스 목사는 대영성서공회에 보낸 편지에서 서상륜은 개혁교회신앙에 입교한 최초의 조선인이라고 하였다.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계속해서 서상륜, 이응찬, 김진기, 백홍준 등의 도움을 받아 1883년에 뎨자 행적”(사도행전)예수 셩교 전셔 말코 복음”(마가복음)을 출판했고, 1884년에는 예수 셩교젼서 마태복음을 발간했다. 만주에서의 조선어 성경 번역과 출판은 일본 이수정의 것보다 5, 6년 정도 앞선 것이었다. 1887, 드디어 예수 셩교전서라는 신약성경 전부가 번역 출판되었다.

서상륜은 누구보다 복음의 뜨거운 불을 품은 전도자였다. 그는 권서인으로 번역 출판된 조선말 성경을 가지고 먼저 만주에 흩어져 사는 각지의 조선 동포들을 두루 찾아 성경을 보급했다. 그는 1883년 이른 봄, 조선말 성경과 상류계급 전도를 위한 한문 성경을 가지고 입국하려다 압록강 국경 심문소의 검문에 걸려 모든 성경을 몰수당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다. 몇몇 관리의 묵인으로 탈출한 그는 고향 의주의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황해도 솔내로 내려와 거기 머물며 복음을 전했다. 그는 로스 목사로부터 조선말 성경을 공급받아 전도하였고, 개종자를 얻게 되어 로스 목사에게 13명의 친구들에게 세례를 베풀며, 교회를 조직해 줄 것을 청원했다.

이즈음 서경조는 서울에 와서 형으로부터 받은 신약전서와 덕혜입문등의 소책자를 받고 소래로 돌아가 신약을 여러 번 읽은 후 구원의 확신을 얻어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후 그는 형과 열심히 전도하여 1885년까지 20명의 세례 지원자를 었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순수하게 조선인에 의한 자립(自立), 자조(自助), 자영(自營)의 개혁주의 장로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솔내는 한국 장로장로교회의 요람지였다. 그 마을 58세대 가운데 50세대의 가족이 복음을 받아 들임으로거의 마을 사람 전체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공동체가 된 것이다. 백홍준은 1879년 로스 번역 복음서를 가지고 돌아와 그의 고향 의주에서 전도하였다. 그는 첫 번째 매서(賣書) 조사가 되었고, 반년이 못되어 십여 명의 개종자를 얻어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것은 솔내의 교회보다 앞선 신앙공동체였다.

일본에서는 이수정에 의해 성경번역이 이루어졌다. 온건 개화파 학자인 그는 임오군란 때 민비를 구출한 공으로 1882년 수신사 바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게 되었다. 그가 일본에 건너간 원래의 목적은 개화된 선진 문화와 산물을 시찰하고 연구하는 것이었지만, 기독신자인 농학자 쯔다센을 만나 친교를 갖는 가운데 그에게서 한문성경을 얻고 기독교 교리에 관한 대화를 갖게 되었다. 그는 성경을 읽는 중에 복음진리를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는 18834, 동경의 개혁주의 장로교 계통 교회인 일치교회의 쯔유쯔끼쪼 교회에서 야스가와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의 개종과 신앙고백은 일본교회와 미국 선교사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미국성서공회의 총무로 봉사하고 있었던 루미스(Henry Loomis) 목사는 그를 찾아가 복음서를 조선말로 번역하는 일을 맡아 줄 것을 제안했다. 그는 우선 한문성경에 토를 다는 방법으로 소위 현토성경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18836월부터 조선어 번역에 착수하게 되어 18844월에 마가복음을 완역, 18852월 미국성서공회에 의해 요꼬하마에서 6천부가 간행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의 첫 번째 복음 선교사로 임명된 미 북장로교 언더우드 목사와 미 감리교의 아펜젤러 목사가 한국에 들어가게 되는 때에 맞추어지게 된 셈이다. 이들은 188545일 한국에 들어올 때,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들어오게 되었다.

이수정은 성경을 번역했고, 전도와 한국선교를 위해 선교사를 불러들이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그는 일본에 와있던 30여명의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해 여러 유학생들이 예수를 믿었다. 또한 재일 미 선교사들에게 한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장로교회 선교사인 낙스 목사는 이 신사(이수정)는 한국에 선교회가 개설되어야 한다고 간절히 소원하였다고 본국에 알렸다. 이수정의 요청을 받은 미 장로교회는 한국의 마케도니아인의 부름이라고 일컫고,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831213일자로 그는 미국 교회 앞으로 진정서를 보냈다.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보내주지 않으면, 다른 나라가 그들의 교사들을 신속히 파송하리라 생각되며, 또한 그 가르침이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까 하여 걱정하게 됩니다”. 그 결과 미 장로교 선교회는 1884년 초,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기로 결정하고 언더우드를 임명하였다.

일본에서 조선 선교를 도운 사람들 중에는 미 선교사들 뿐아니라 스코틀란드 장로교회 선교사도 있었다. 그는 로스 목사로부터 2천권의 복음서와 많은 소책자를 받아, 일본인 신자 나가사끼를 부산에 매서인으로 보내어 2개월간 선교지 탐사를 하게 했다. 1884년에는 성경보급소를 세웠다.

1873년 대원군이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1874년 고종이 친히 통치하게 되면서 쇄국정책을 끝나게 되며, 외국과의 통상이 시작되었다. 미국에 이어 영국, 독일, 불란서와 수호족약을 체결하면서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며, 선교사를 받아드리는 환경으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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