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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보 원로와의 대화12 허순길 교수와의 대화

최고관리자 12-12-06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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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보 링크에서 관련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개혁교회 신앙과 생활 원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허순길 교수는 1933년 12월 15일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출생했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함양에서 중등교육을 받았다. 1954년 3월에 고려신학교 예과(후에 칼빈학원)를 수료하고 고려신학교 본과에 진학해 1961년 2월 제15회로 졸업했다. 김장수 이삼열 임종만 전은상 정판술 차영배 등이 동기들이다. 대구 서문로교회 전도사로 부임하면서 계명대학 교육학과에 편입해 1963년 졸업하고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1963년 10월 서문로교회의 청빙을 받고 담임목사로 일하던 중인 1966년 9월 화란 캄펜신학교로 유학해 캄파이어스 교수 휘하에서 수학하고 신학석사(Drs)와 신학박사(ThD) 학위를 받고, 1972년 6월 귀국했다.

 

1969년 7월부터 고려신학교 전임강사로 가르치기 시작해 1977년 12월까지 고려신학대학 부교수로 봉사했다. 1978년 1월부터 9년간 호주 퍼스(Perth) 화란인들의 후예들이 중심이 된 호주자유개혁교회(Free Reformed Church of Australia)에서 목회자로 활동하던(1987년 7월까지) 중 다시 고려신학대학의 부름을 받고 1987년 8월 고려신학대학원 교수로 부임했다. 이때부터 1999년 2월 정년으로 은퇴하기까지 12년간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혹은 원장(1988.9-1994. 3, 1997.1-1999.2)으로 봉사했다.

현재 부산과 호주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2012년 5월 16일 수요일 오후 3시 30분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갑오마을 부영아파트 708동 1204호에 거주하는 허순길 교수의 자택을 방문해 성희찬 목사(마산제일교회), 김흥식 연구원이 함께 한 자리에서 허순길 교수와 대담했다.

■ 이상규 교수 / 고신대학교 부총장


이상규 교수 : 허 박사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허순길 교수 : 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5년 전에 큰 수술을 했습니다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은퇴하고 호주에 다녀오기도 하고 한국에서 지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부르는 교회가 있으면 가서 설교도 합니다.

이 교수 : 신대원에 있는 고신역사기념관에서 문서 자료는 물론이지만 오디오나 비디오 자료 등 각종 역사자료를 수집하고 있는데, 생존해 계시는 원로들을 방문해 대담도 하고 증언도 듣고 후일의 자료로 제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허 박사님을 찾아뵙게 된 것입니다. 제가 지금은 대학의 부총장직을 맡아, 역사관은 이성호 교수가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만, 제가 부산에 살고 있어서 이번에 교수님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마침 성희찬 목사님도 교수님을 뵙고 싶어 해 같이 오게 됐습니다. 우선 교수님의 살아오신 이력이라 할까, 삶의 여정을 듣고 싶습니다.

허 교수 : 생각해 보면 지난 일생은 은혜로 살아온 날들이지요. 저는 일제시대도 경험했고 6․25동란도 경험했고, 공산 치하에서도 지내보았는데, 어려운 시기를 살아왔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해방을 맞았습니다. 1, 2학년 때는 조선어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 후에는 우리말을 쓰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았지요. 그 때 다 가난하고 어려운 세월을 보냈지요. 초근목피로 연명하다가 해방을 맞았는데 제가 어렸습니다만 그 때의 감격을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학교 갈 수도 없었습니다. 학교도 교사도 다 부족했지요. 그래서 해방 후 얼마동안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반년 후에 6학년에 편입해 다시 공부했지요. 1947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려 했으나 아버지가 학교 못 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모친께서 1947년 전도를 받고 함양군 지곡면의 개평교회에 출석하셨는데, 어머님의 간곡한 의지로 아버지의 생각을 꺾으시고 공부하도록 허락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함양중학교에 입학해 공부하게 됐습니다. 저도 모친을 따라 교회 다니게 됐는데, 이때 교역자가 박태수 전도사였습니다. 제가 그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분은 경건하고 기도도 많이 하시고,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곧 17살 때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서부경남지방에 인민군이 들어와 어려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이 교수 : 개평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셨고 또 박태수 전도사님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다고 하셨는데, 어떤 동기에서 신학도의 길을 가게 됐습니까?

허 교수 :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전도자의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덕암에 살던 제가 함양으로 나와 민영석 전도사 집에서 지내며 고등학교 다닐 때 주일학교를 도왔는데, 이런 일들이 전도자의 길을 가게 된 동기가 된 것 같습니다. 1954년에 고려신학교 예과에 입학했습니다. 김의환 박사가 2회였고 제가 3회였습니다. 그 때는 광복동 교사 시절인데 학교라고도 할 수 없었지요. 원래 광복동 교사는 일본 식산은행 직원이 살던 숙소였습니다. 그곳이 고려신학교 교사였는데 2층 다다미방이었습니다. 그곳에 낮은 책상을 놓고 공부하고, 저녁에는 그곳이 숙소였으니 이불을 쌓아놓고 수업했지요. 그 후 1955년 감천으로 옮겨가 수업했는데 그 때는 칼빈학원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는 감천도 작은 어촌이었고, 6․25 전쟁 때 영국군이 사용하던 막사였습니다. 한명동 목사가 원장이었고, 장준하 선생의 부친인 장석인 목사가 철학을 가르치고, 김진홍 목사가 히브리어를, 조용석이라는 두 분의 동명이인이 계셨는데, 독일어와 영어를 가르쳤지요. 박손혁 목사님은 교무를 담당하고 계셨지요. 저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등록도 못했는데, 박태수 목사님이 5천원을 보내 등록을 한 일도 있습니다. 돈이 없어 진주 복음병원에서 서기 겸 전도사로 일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료들과 장석인 목사님의 권고로 학업을 계속해 박윤선 교장님의 집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공부하게 됐습니다. 본과에 입학하면서 조교로 일하게 돼 박윤선 목사님이 쓴 주석 원고를 원고지에 옮겨 쓰고 교정도 보고 박윤선 교장 집에서 지내면서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박윤선 목사님과 같이 지내면서 보고 배우게 됐습니다.

이 교수 : 박윤선 목사님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겠습니다. 가까이에서 보신 박윤선 교장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허 교수 : 제가 박윤선 목사님으로부터 많이 배우고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진정한 신학자입니다. 또 경건한 분이시고 신학과 영력을 겸비하신 흔치 않으신 분이지요. 그 분은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기도 많이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그 분은 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는 교단 직영신학교가 아니고 일종의 사설 신학교인데 월급을 제때 준 일이 없습니다. 돈이 들어오면 봉급을 드리는 정도였습니다만 이런 점에 불만을 표한 일이 없습니다. 당시로 볼 때 박 교장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화란어도 자습으로 익혀 화란신학을 소개했습니다.

이 교수 : 이런 분이 고신을 떠나게 된 일은 안타까운 일이지요?

허 교수 : 그렇지요. 박윤선 목사님이 1953년에 하란으로 유학을 떠나셨으나 사모님의 급서로 귀국하게 되는데, 화란의 자유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받은 제목이 ‘신약과 이교사상’(New Testament and Paganism)이었는데, 이 논문을 쓰기위해 1957년과 58년을 투자했어요. 논문 건으로 박 목사님이 화란으로 가기 전에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가서 좀 더 정리하려는 생각으로 1959년 12월 27일 미국으로 갔어요. 그런데 1960년 초에 갑자기 귀국했어요. 미국에서 논문 프로포잘을 보냈는데 화란 자유대학교가 적절치 못하다고 거부한 것입니다. 박윤선 교장이 이해한 페이거니즘이라는 것은 동양사상이었는데, 지도교수는 그렇게 이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도교수는 초기 기독교 세계에서의 이교주의였습니다. 페이거니즘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에 박 목사님은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귀국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때 박 목사님도 약간의 시험이 들지 않았나 생각해요. 귀국하신 박윤선 목사님이 경건회 설교에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강단에 담배연기가 자욱합니다”라는 식으로 부정적인 점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제가 놀랐습니다. 저는 시험이 들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분도 인간이니까 박사논문 건이 잘 안 돼 부정적인 생각을 하신 것이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해에 주일성수 문제가 제기된 것입니다. 이 때 박 목사님은 주일성수와 관련된 글 많이 썼는데, 결국 교장직에서 해임 당했지요. 뒤돌아보면 이사회가 좀 심했다고 봅니다. 어쨌든 그 분이 고신을 떠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 교수 : 저는 박윤선 목사님이 고신에서 개혁신학의 기초를 놓으셨는데, 고신을 떠난 것은 안타가운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박윤선 목사님이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 합동신학교로 옮겨가시면서 한국에 개혁신학을 확산하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고신에서만 활동했다면 개혁신학의 폭은 현재만큼 되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박윤선 목사님이 고신 떠나게 되는 주일성수 문제와 관련해 한상동 목사의 책임이 없었나요?

허 교수 : 책임이 없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1956년은 고려신학교 설립 10주년이 되는 해인데, 이 때 박 교장이 교회당 쟁탈전 문제, 신학교 이사회 문제 등 현안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고신의 첫 10년은 화평했는데, 그 후에는 좀 어려운 일이 있었지요. 당시 박손혁, 한상동 등은 교수이면서 이사였으나 박윤선은 학교 일만 하는 교수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좀 불편해 했고 이런 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고려신학교 10주년 후 경기노회 떨어져 나갔고, 1957년에는 박윤선 교장이 고려신학교 나와서 서울서 개혁신학교를 열지 않습니까? 이상근 교수도 따라 나가고, 박윤선 없는 고려신학교는 공허하니까 이사회가 찾아가 다시 모셔 오게 됩니다만, 주일성수 문제가 제기됐을 때 이사회는 박윤선이 좀 심하다 여겨 그의 기(氣)를 한번 꺾으려고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 교수 : 허 박사님은 고려신학교 졸업 후에는 교회일도 하지만 곧 유학을 가게 되었지요?

허 교수 : 재학 중에는 박윤선 교장의 조교로 일했고 전도사로 일하지 않았는데, 졸업 후 처음으로 대구 서문로교회 전도사로 갔습니다. 1961년입니다. 그 때 주일학교를 담당했는데, 3백여 명 모이던 학생들이 5백여 명으로 성장했습니다. 강도사도 되고, 후에 황철도 목사님이 서현교회 계시다가 서문로교회로 오셔서 제가 부목사 역할을 했습니다. 그 때 황철도 목사님이 폐가 나빠 일 못하고 곧 소천 하였어요. 서문로교회가 저를 담임으로 청하자는 말이 오가고 했는데, 오종덕 목사님이 주관한 공동의회에서 3분지 2가 훨씬 넘는 신임을 받고 제가 담임목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로 일하던 중 1966년 9월에 화란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지요.

이 교수 : 어떻게 화란으로 가게 됐습니까?

허 교수 : 친구인 차영배가 먼저 화란에 있었던 영향도 있었지만 이근삼 교수가 추천했지요. 차영배는 해양대 다니다가 고려신학교로 왔고 나와 본과 동기가 됐는데 먼저 화란으로 갔고, 또 이근삼 박사가 화란으로 가도록 적극적으로 추천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화란으로 가서 공부하던 중 1969년에 독투란두스(Drs) 학위를 받고 귀국해 고려신학교에서 1학기 강의한 일이 있습니다. 그 무렵에 대학 인가를 받기 위해 저를 교수 명단에 올리게 됐습니다. 1972년 8월에는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1977년까지 교수로 일했습니다.

이 교수 : 왜 교수직을 그만 두고 호주로 가게 됐습니까? 그 당시 저는 학생이었는데, 이런 저런 소문이 있었습니다.

허 교수 :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공동체에서 함께 일할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동역자간의 문제인데, 제 입장에서 볼 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있었지요. 동역자끼리 거리낌이 없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호주의 화란인 후예들의 자유개혁교회(Free Reformed Church of Australia)에서 청빙을 받게 돼 호주로 가게 됐는데, 뒤돌아보면 하나님의 인도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한명동 목사님이 이사장인데, 호주 못 간다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던 중 가기로 마음을 정하고 수속 기간이 길어져 1978년 1월 호주 퍼스에 있는 아마데일(Armadale)교회로 부임했지요.

이 교수 : 호주에서의 목회생활에서 얻은 유익을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허 교수 : 저에게는 정말 소중한 기간이었습니다. 유학할 때도 많이 배우고 했습니다만 호주에서 목회하면서 개혁주의 생활과 원리를 깊이 체득하는 기회가 됐습니다. 개혁교회의 생활에 대한 저의 글들은 이 때 목회에서 얻은 결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교수 : 허 교수님이 쓰신 ‘개혁해가는 교회’(1991), ‘개혁교회의 목회와 생활’(1994)은 비록 학문적으로 쓴 책은 아니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유익을 준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 책을 보면서 개혁교회의 목회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점에 대한 지침을 얻고 많이 배웠습니다.

허 교수 : 그렇습니다. 학술적인 책은 아니라하더라도 개혁교회의 바른 목회관이나 생활원리를 말한 것인데, 예상 보다 많이 읽혀졌고 여러분들로부터 격려 전화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이 교수 : 살아오시면서 후회스런 일은 없었습니까?

허 교수 : 동역자 관계에 있어서 좀 그러했고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저는 제가 정도(正道)를 갔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몇 년 후 상대편에 편지를 써서 하나님 앞에서 정리하고자 했는데 답신은 받지 못했습니다. 또 제가 귀국해 경험했습니다만 사람을 신뢰한 일로 큰 손실을 본 일이 있는데, 사람을 신뢰했던 것을 후회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은 다 잊고 다 해결했지요. 그분께도 편지를 써서 하나님 앞에 가기 전에 해결하고 가자고 했는데, 그 분으로부터도 답신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교수 : 그 점은 상대편의 반응과 관계없이 허 박사님이 잘하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허 박사님은 역사가로 일생을 사셨는데, 허 박사님은 역사를 어떻게 보십니까? 역사관이라할까 역사를 보는 입장이 어떠하신지요?

허 교수 : 우리의 행보를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라고 봅니다.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주님이 역사의 주인이자 주체이지요. 저는 저 개인의 삶의 여정에서도 이 점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제가 80이 됐는데, 주님이 배후에서 저의 인생 여정을 이끌어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교수 :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지요? 허 박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기독교적 역사관의 기본인 섭리사관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우리 교회나 고신교단(총회)에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허 교수 : 고신교단 생활의 정체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모든 면에서 통일성을 잃었습니다. 또 시류에 너무 쉽게 편승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바른 교회 건설을 위해 노력하는 이가 있으나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에 대해 알고 있는지 걱정이 됩니다.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들어보면 개교회주의나 담임목사 중심의 주관주의가 심합니다. 그래서 고신의 정체성이 흐려지는 것 같아 염려가 됩니다. 한상동 목사님은 실수한 일도 있으나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지금도 교회가 언약의 말씀에 신실하고 충실한 교회가 돼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교회와 교단이 개혁교회 신앙과 생활 원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 교수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어떤 일입니까?

허 교수 : 회고록을 쓰려고 합니다.

이 교수 : 꼭 써 주십시오, 후일에 귀한 자료가 되겠습니다. 긴 시간 대화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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