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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보 원로와의 대화11 김창인 목사와의 대화

최고관리자 12-12-0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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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news.or.kr/news/view.html?smode=&skey=%B1%E8%C8%EF%BD%C4&section=1&category=5&no=1258

(기독교보 링크에서 관련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세상의 부귀는 모두 헛된 것이지요” 

고신역사기념관(관장 이상규 박사)과 고신언론사는 고신교회의 역사와 신학, 그리고 신앙 전통과 관련된 각종 자료의 보존과 체계적인 관리가 고신교회의 신앙정신과 이념 계승을 위해 시급한 현안이라고 뜻을 모으고 ‘고신역사 보존 운동’을 함께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약속에 따라 본보는 매달 마지막 주간에 발행되는 신문에 ‘역사의 현장 속으로’를 기획특집으로 편집 제작합니다. 고신역사기념관과 협력해 고신교회 역사와 관련된 산 증인들의 생생한 증언들을 싣는 기획특집에 독자님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1917년 음력 10월 24일(양력 1월 18일)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에서 출생한 김창인 목사는 고려신학교를 11회로 졸업했다. 부친 김택연 씨와 모친 김택신 씨 사이의 5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난 김 목사는 양친의 신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회고하는 양친의 신앙은 대단한 것이었다. 부모와 같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많은 옥고를 치른 김 목사는 이북에서 사역하다가 1948년 월남해 고려파와 관계를 맺게 됐다.

김창인 목사는 어려서부터 부친의 신앙 인격을 배우고 이기선 목사로부터 목회자의 굳은 신앙의 절개를 배워 한국 교회에 큰 목회를 감당하는 사역자가 됐다. 그는 교회 건축이 끝난 만 70살을 맞은 해에 정년 제도가 없었음에도 자의로 사임하고, 퇴직금과 재산 일체를 교회에 헌금했다.

올해 96살이 된 김 목사의 과거 목회 회상과 말씀은 좋은 가르침이 됐다. 세상의 모든 부귀는 헛된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그의 권면은 언제나 강조돼야 할 목회자의 윤리일 것이다.

현재 김 목사가 설립한 충현교회는 1960년 합동 이후 환원하지 않아 예장(합동)에 속해 있으며, 담임목사의 목회 세습과 교회재산과 관련해 내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한 때 충현교회에 출석하던 김영삼 장로가 대통령에 취임해 충현교회가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김 목사와 대담은 고신역사연구소 소장인 이상규 교수와 함께 했으나 사정에 의해 이 기사는 본 연구원이 작성하게 됐다..

■ 김흥식 / 역사연구소 연구원

김흥식 연구원 : 먼저 목사님의 가정 배경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김창인 목사 : 3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제 부친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독신 시절부터 예수를 믿었고, 가문의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가문을 떠날 정도로 독실한 분이셨어요. 부친이 35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기도하며, 구제에 힘쓰셨습니다. 부친은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셨지요.

부친이 35살, 병환으로 입원하였습니다. 그때 어머니와 나눴던 대화가 기억납니다.

“여보?”

“왜요?”

“집으로 갑시다. 퇴원하고 갑시다. 여기는 더러워서 못 있겠어.”

“깨끗한 병원이 뭐가 더러워요?”

“저기 좀 봐!”

그때 부친은 천국을 보신 거예요. 그분은 평생에 원수가 없었어요.

저는 오 형제 중에 셋째였습니다. 첫째 형님은 신앙을 지키다가 공산당에게 총살을 당했습니다. 둘째 형님은 이북에 남았는데 그 후 소식을 모릅니다. 넷째는 김창명 목사입니다. 그리고 막내는 수술하다가 병이 나서 세상을 떠났지요.

김 연구원 :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목사님이 영향을 받으신 분이 있을 텐데 누구에게 큰 영향을 받았습니까?

김 목사 : 저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오직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이 바로 이기선(李基善) 목사님이지요. 저는 이 목사님을 평안북도 의주에서 만났습니다. 이 목사님은 1930년부터 1937년까지 의주에서 사역하셨지요. 위화도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어린 시절부터 이 목사님이 저를 지도하셨어요. 입교문답도 이 목사님이 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본래 포목장수셨는데, 이분이 교회를 잘 다니니까 순회 목사님들이 전도사가 되라고 권면하였지요. 목사님들은 노회에서 한 달에 8원을 지원할 테니 전도사로 헌신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하루에도 8원을 버는 사람이에요. 그런 분에게 한 달에 8원을 준다고 한 것이지요. 그래도 자꾸 권면하니 결국 전도사가 되었지요. 그래도 이 목사님이 하는 말씀이 한 달에 8원을 받아도 일생동안 굶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분이 저에게도 신학을 하라고 권하셨지요.

김 연구원 : 이 목사님의 권유로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되셨군요.

김 목사 : 이기선 목사님께 배우면서 중학교 시절부터 시골교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어렸지만 시골 교회 장로님들은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설교 준비를 체계적으로 한 건 아닙니다. 나이도 어렸고 방법도 몰랐어요. 단지 노트에 대지와 소지 정도를 옮겨서 설교하였지요. 하지만 부흥회는 은혜 가운데 잘 마쳤습니다. 더구나 폐결핵에 걸려서 산에 요양하러 갔는데, 그곳에서 설교하기도 했지요. 제가 20살이 되던 1936년, 의주군 주내면의 청전교회에서 전도인으로, 1937년 월화면 해천교회에서 전도사로 청빙을 받으면서 사역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김 연구원 : 이 목사님이 목회 생활 전반에 많은 가르침을 주셨겠습니다.

김 목사 : 이기선 목사님은 정말 훌륭한 분이십니다. ‘세상부귀 여분토 하면 상제능력 자연부(世上富貴 如墳土 上帝能力 自然富)’라는 글을 쓰셨어요. 세상의 부귀를 분토처럼 여기면 하나님이 능력이 너도 모르는 사이에 영육 간에 부자로 만들어 주신다는 말이지요.

이 목사님이 써 주신 글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 글이 지금도 제 방에 걸려 있어요. 이 목사님의 가르침을 받고 저는 평생에 저금통장 하나 없이 살았습니다. 은행에 가 본 적도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돈이 많이 들어오면, 이 사람 저 사람 다 주었지요. 그러고 나면 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기선 목사님은 전도사역 할 때 두 가지를 조심하라고 하셨어요. “첫째로 돈 문제를 조심하거라. 내가 포목장사 그만두고 전도사를 해도 한 끼 안 굶었다. 걱정 없다. 그러니 돈 문제 걱정 마라 하셨고, 둘째는 여자 문제입니다. 너는 인물이 잘 생기고 노래를 잘 부르니 여자가 잘 따를 것이다. 여자는 꽃이니라. 예쁜 꽃은 눈으로 보는 것이지, 만지는 것이 아니니라. 꽃을 꺾으면 꽃도 죽고, 꽃에 독이 있기 때문에 너도 죽는다. 그러니 여자는 꽃인 줄 알고 눈으로 보되, 절대 손대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래서 제 평생에 여자 성도들과 악수한 적이 없고 손 한번 잡아 본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이기선 목사님은 무서운 분이시지만 정말 훌륭한 분입니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고 6년 동안 감옥에 계셨던 위인이시지요.


 김 연구원 : 이기선 목사님은 당시 평북지방에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김 목사 : 그렇지요. 이기선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가결한 노회를 탈퇴하고,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교인들과 예배를 드렸습니다. 당시 이 목사님과 함께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한 인물로는 김형략, 박의흠, 계성수, 김성심, 오영은, 김화준, 심을철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하시다가 결국 만주로 가게 되셨지요. 그곳에서 헌트(Bruce Hunt, 한부선) 선교사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계속하였습니다.

김 연구원 : 김 목사님도 신사참배를 반대하시고 감옥에도 갇히셨지요?

김 목사 : 하지만 계속 있지는 않았어요.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했지요. 제가 옥에 있었을 때, 송사천 학생이 좋은 설교를 많이 했지요. 저는 어른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하고, 송사천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송사천이 아침 설교할 때, 아멘 소리가 컸지요. 제 아들에게 저와 송사천 중에 누가 설교를 잘 하느냐고 물어 본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아들이 하는 말이 “당연히 송사천이 낫지!”라는 거예요. (웃음)

김 연구원 : 재건 교회 운동도 함께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 목사 : 제가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로 다 무너졌으니 다 다시 하자고 했어요. 그리고 이 운동을 ‘재건(再建)’이라고 하자고 했지요. 그래서 재건 교회가 된 겁니다. 제가 재건 교회라고 명명하면서 한 몫을 한 거예요.

평북 만포읍에 있는 만포교회를 재건하고 전도사로 있기도 하면서 김인희(金麟熙) 전도사와 재건 교회 운동을 같이 했지요. 하지만 이들과 끝까지 함께 하지는 못했지요. 재건교회의 극단적인 독선적 면을 비판하다가 결국 이들과 헤어졌어요.

김 연구원 : 당시 이북에서 공산정권이 들어서는 등 혼란스러웠는데, 이때 상황은 어떠셨나요?

김 목사 : 1946년에 들어선 공산당은 교회를 핍박했어요. 그들은 기독교연맹을 만들어 기독교를 정치세력으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공산당원에게 대항하다가 자주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1948년에 월남하게 되었지요.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김 연구원 : 고려신학교 제학 시절이 교사가 광복동에 있을 때였는데, 그 때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 목사 : 예 그 때는 광복동 시절이었지요. 부산 광복동 고려신학교와 서울을 왕래했습니다. 그 때, 충현교회를 개척했지요. 제가 스무 살에 전도사가 된 후에 예배와 부흥회를 계속 인도했어요. 지금 돌아보면 부끄럽지요.

김 연구원 : 목사님 말씀이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당시 고려신학교의 교수 중에 기억나는 분이 있으시겠지요?

김 목사 : 한상동 목사님이 교장이었고, 이상근, 오종덕 등이 가르쳤습니다. 그중에서도 박윤선 박사님의 가르침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지요. 제가 그분께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김 연구원 : 거실에 걸린 민족복음화성회 사진을 보니까 목사님이 활동하시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좋은 사진이군요. 앞으로는 이런 대형 집회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김 목사 : 이 대회에서 약 200만 명 정도 모였습니다. 1988년도 당시 제가 대회장이었지요. 앞으로 한국 교회가 이만큼 많은 인원이 모여서 집회하기는 힘들거예요. 1992년 대회에는 조용기 목사가 회장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입니다. 제가 중 3때, 폐병을 앓아 학교를 그만두었는데, 96살을 살았고, 이런 무식쟁이가 수많은 사람이 모인 대회를 인도하다니요. 생각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저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설교하다가 피가 나오면 피를 받아가면서 설교했습니다. “그날을 늘 기다리고, 내 등불 밝게 켜 들고 주님께서 문을 여시면 김창인 척척 들어갑니다” 저의 찬송입니다. 당시 저의 폐병은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몇 년 전만하더라도 설교할 때, 피가 나와서 한참 토하고, 피를 받아가며 설교했어요. 그런데도 살았지요. 죽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으니까 하는 거예요.

김 연구원 : 목사님께서 부산에 오셔서 집회하실 때도 설교 중에 노래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김 목사 : 찬송을 좋아하니까 불렀지요. 의사는 폐병이 있기 때문에 목소리를 높이면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냥 그렇게 했어요. 중학교 3학년부터 폐병쟁이가 96살까지 살았으니. 저는 찬송을 참 좋아합니다. 설교하는 중에도 찬송을 자주했지요. 그 중에서도 많이 부른 찬송은 ‘나의 갈 길 다가도록’, ‘후일에 생명 그칠 때’ 그런 찬송입니다.


김 연구원 : 목사님께서 그런 확신으로 사셨기 때문에 오늘 충현교회 같은 큰 교회를 세우게 된 것으로 봅니다.

김 목사 : 저는 그런 꿈도 꾸지 않았는데, 자꾸 모이고 헌금내고 하니 그렇게 되었지요. 제가 대형 교회를 원한 건 아니에요. 저는 구경만 한 것이죠.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계획해서 교회당을 세우고 한 것은 아닙니다. 필요에 따라 교회당을 세우다 보니 큰 교회가 된 것입니다.

저는 데살로니가 등 서신서를 많이 설교했어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기도하라” 무엇을 기뻐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기쁨을 유지하도록 기도하고, 어려움을 만나도 극복하고 기도하라고 설교했지요. 저는 원고를 쓸 줄 모릅니다. 단지 소제목들만 몇 줄 썼지요. 설교하다가 피를 토한 적이 종종 있었는데,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이 없으니 그렇게 한 거예요.

김 연구원 : 고신의 후배들에게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 목사 : 이기선 목사님이 이렇게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하루 밥 세끼 먹지? 하루 성경 석장 이상 봐!” 이기선 목사님이 저를 많이 사랑하셨어요. 이 목사님이 가르치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밥을 먹는 것보다 중요하지요. 바로 그겁니다. 고신의 후배들은 이기선 목사님이 가르친 말씀을 잘 배웠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밥을 먹기 전에 말씀을 봐야지요. 그리고 삶에서 말씀을 우선순위에 두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요. 그리고 신학교에서도 말씀을 배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돈이나 명예가 아니에요. 세상 부귀는 모두 헛된 것입니다. 

고신역사기념관, 고신역사연구소, 고신역사사료관 (31071) 충남 천안시 동남구 충절로 535-31(삼룡동) Tel. 041-560-1977 E-mail: kegori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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