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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보 원로와의 대화10 유환준 목사와의 대화

최고관리자 12-12-06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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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보 페이지 링크에서 관련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현지선교사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것이 바람직한 선교정책입니다”

 고신교회(단)는 1956년 총회 조직을 기념해 1958년 대만에 김영진 선교사를 첫 선교사로 파송했는데, 그로부터 16년 후인 1974년 유환준 목사를 대만에 두 번째 선교사로 파송했다. 1931년 10월 15일 경남 거제시 연초면에서 출생한 유 목사는 군 복무 중 기독교 신자가 돼 고향 거제도 연초면 한내리에서 가장 먼저 신앙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를 통해 한내 지역이 복음화 됐으며, 부산과 대만에 이르기까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는 복음이 전파자가 됐다. 1965년 제20회로 고려신학교를 졸업하고 1968년 경동노회에서 목사로 장립된 그는 4년간 부산 동래구 거제교회에서 사역했다. 그리고 1972년 총회가 그를 대만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의해 1974년 파송됐고, 그때로부터 2001년까지 28년간 대만 선교사로 봉사했다. 유 목사와 대담은 고신역사연구소 소장인 이상규 교수와 함께 했으나 사정에 의해 이 기사는 연구원이 작성하게 됐다. ■ 김흥식 / 역사연구소 연구원

김흥식 연구원 : 유 목사님께서는 군에서 예수 믿게 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밖에 군에서의 경험이 후일의 신학공부와 선교사의 길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을까요?

유환준 목사 : 군에 있을 때 카투사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어를 숙달하는데 도움이 되었지요. 어느 날 일본 규슈에 있는 모리야마라는 산에서 3개월 훈련받았는데, 미군들은 모두 기관장이 되고, 저희들은 부대원이었지요. 그곳에서 기독교 교인들과 접촉이 되면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군에 있으면서 박정덕 목사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박 목사님도 카투사로 있었어요. 그리고 경북에서 온 친구들이 있었는데, 모두 신앙생활을 잘했습니다. 그 때가 처음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되는데, 이때의 감격이 후일의 저의 결단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김 연구원 : 전역 후에는 어떻게 신앙생활 하셨나요?

유 목사 : 군에서 전역하고 고향인 거제 연초면 한내리로 돌아왔습니다. 군에 가기 전에는 고향에 교회가 없었는데, 전역하고 돌아오니 교회가 하나 서 있었습니다. 이 동리는 100호 정도 되고 인구가 약 450명 정도 되는 시골이지만 비교적 큰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이 동리에서 제가 처음 예수를 믿은 겁니다.

현재 고현시 근처 제산이라고 하는 곳에 당시 사립중학교가 하나 설립되었는데, 제가 그곳에 영어교사로 가게 되었지요. 약 4년간 그곳에서 가르쳤습니다. 주일이 되면 한내교회까지 가야 했어요. 8킬로 정도 되는 거리를 첫 아이를 안고 다녔습니다. 교회에 출석한지 얼마 되지 않아 집사를 하라고 해서 했어요. 당시에는 집사가 뭔지도 몰랐어요. 영수님이 한 분 계셨는데 저보고 영수를 하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27살에 교회 영수가 되었습니다. 한내교회에 오용규 전도사님과 여전도사님 한 분이 사역자로 오기 전에 제가 설교도 하고 주일학교도 맡았습니다. 그 때 주일학교가 많이 성장했지요. 그러니 교인들이 저더러 신학공부를 하라고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신학을 권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고, 고려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김 연구원 : 그래서 신학교 입학하시게 되었군요. 그 때의 사정을 말씀해 주시지요.

유 목사 : 제가 29살에 칼빈대학, 곧 고려신학교의 예과 과정에 입학했습니다. 칼빈대학에서 4년 공부했습니다. 옥한흠, 이경삼, 변기안 등이 동기들이었습니다. 칼빈대를 졸업하고 고려신학교에 진학해서 1965년에 20회로 졸업했습니다. 신학교 졸업 후, 한내교회에 조금 있다가 감천에 있는 칼빈대 안에 있던 칼빈교회에 전도사로 갔습니다. 당시 칼빈교회에는 목사님이 계시지 않았어요. 차영배 교수님이 임시로 칼빈교회에 계셨는데 이후에 제가 전도사로 간 거예요. 칼빈교회가 지금의 감천중앙교회입니다. 그리고 괴정제일교회에서 전도사로 있다가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울릉도에 있는 신흥교회에서 2년간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래구 거제리에 있는 거제교회로 옮겨가 4년 있었습니다. 거제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대만 선교사로 갔지요.

김 연구원 : 어떤 계기로 선교지로 가시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유 목사 : 제가 거제교회 갔을 때 성도가 140명 정도였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 제가 대만 선교를 권유받을 때에는 240명 정도 되었습니다. 당시 부산에 있는 교회 중에는 제법 큰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교회에 관한 좋은 소문이 나서 그런지 당시 부산노회 선교부 부장으로 있었던 한동석 목사님이 와서 대만 선교사로 가라고 권하였습니다. 김영진 선교사님이 암수술을 했는데, 그 뒤를 이을 후계자가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좋은 분을 보내라고 하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오셔서 대만에 갈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겠다고 하였지요. 나중에 알았지만 한 목사님은 홍관표, 신현국 목사님에게도 대만 선교를 권유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대만 선교사로 가는 것은 1972년 총회에서 결의되었는데,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74년도에 출국하게 되었습니다.

김 연구원 : 대만 선교사로 가시게 되어 거제교회를 사임하셨군요?

유 목사 : 대만으로 갈 수속을 했습니다. 당시 저희 가정에는 세 남아가 있었는데, 국민학교 4학년이었던 막내를 제외하고 두 사람은 병역을 마쳐야 출국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단 선교부에서는 제가 못 갈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저는 서울에 알고 지내던 집사님에게 두 아이를 맡기기로 했습니다.

저는 1974년 1월 17일에 출국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당일 출국 수속이 안 되어 그 다음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만에 도착하여 김영진 목사님을 뵈었는데 입술이 많이 부어 있었고, 화가 많이 나 있었습니다. 제가 약속된 날에 오지 않았고, 갓난아이도 있었기 때문이지요. 김 목사님 편에서 볼 때는 그 전날 오는 줄 알고 기다렸는데 못 오고 하루 늦게 도착하니 마음이 불편했겠지요.

김 연구원 : 대만 선교부에는 문제가 있지 않았습니까?

유 목사 : 당시 대만 선교사는 김영진 목사님, 이병길 목사님과 제가 있었습니다. 이병길 목사는 제 후에 파송되어 왔습니다. 대만 선교부의 문제는 선교비에 관련한 것이었습니다. 총회 선교부에서는 대만 선교부의 대지를 처분하여 생긴 금액의 반을 선교비로 쓰고, 반은 본국에서 쓰기로 결의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의는 현지 선교부의 의견은 묻지 않은 채 된 것이었지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회의를 거치지 않고 처리된 것에 대해서 대만 선교부에 문제 제기하였지요. 김 선교사님은 재리의 유혹을 막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결의된 것이니 그렇게 따르자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병길 선교사에게 “선교지에서 어렵게 마련된 선교비는 대만에서 사용돼야지 그것의 일부라고 할지라도 본국으로 다시 가져간다는 것은 선교 원칙상 맞지 않다”고 했지요. 그래서 이병길 선교사가 당시 총회장이었던 박현진 목사님께 이런 이유로 전화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선교사는 되레 박 목사님께 질책을 받았다고 해요. 그래서 이병길 선교사도 김 선교사와 의견을 같이 하고, 결국에는 저 혼자만 대만에서 선교비는 대만선교를 위해 사용돼야 한다는 입장이었지요. 이 일이 있은 후에 김 목사님은 선교비를 가지고 이 목사님의 사택을 구입하도록 했습니다. 주택 대금을 모두 지불하고 구입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모르게 이뤄졌어요. 이런 일들이 결부되어 대만 선교부 내에 불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기간은 한 3년 정도 되지요.

김 연구원 : 대만 선교부 문제가 그 후에 어떻게 처리되었습니까?

유 목사 : 대만 선교부에 3년 간 불화가 생기니까 총회 선교부는 대만 선교부 해체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른 선교부에 귀감이 되지 못한다는 사유였지요. 해체 결정이 되기 전에 이병길 목사가 총회 선교부 총무인 곽삼찬 목사 앞으로 보낸 편지에 선교부 불화 해결 대책으로 일곱 가지 방안 제시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로서 선교부 해체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총회 선교부에서는 해체 명령을 내린 것이지요. 하지만 대만 선교부가 해체 공문을 받고 회의할 때, 이 목사는 해체를 명령한 총회 선교부와 부서 총무를 원망하였습니다. 나중에 곽 목사님을 만나고서야 이 목사의 편지대로 대만 선교부가 해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만 선교부 불화가 있던 3년간 저는 총회 선교부에 세 번 소환되기도 했는데, 힘든 기간이었습니다.

김 연구원 : 그래도 목사님께서는 대만에서 훌륭한 선교 사역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 목사 : 제가 대만 선교를 하면서 일곱 교회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김 선교사님의 사위가 김영수 목사인데, 부산 3개 노회 선교부 연합회 총무를 하기도 했는데, 김 목사가 대만 선교지의 일곱 교회를 장인이 세웠다는 글을 낸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역했던 일곱 교회는 대만 선교부에서 세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김 연구원 : 대만에서 신학교도 세우신 것으로 압니다.

유 목사 : 1975년부터 문을 연 신학교는 학생이 없어서 문을 세 번 닫았습니다. 90년부터 다시 시작한 신학교가 현재 많이 성장했습니다. 학생이 70-80명 될 겁니다. 당시에는 외국의 다른 교단과도 함께 신학교를 운영하였습니다. 미국의 CRC 교단과 PCA 교단이지요. 고신에서는 이들보다 인적, 물적 자원을 더 지원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PCA가 주도적으로 운영하는 대만 중견의 신학교가 되었지요.


김 연구원 : 목사님께서는 문서사역에도 큰 기여를 하신 것으로 아는데, 중국어로 내신 책은 얼마나 됩니까?

유 목사 : 제가 중국어로 집필을 시작한 것은 1980년부터입니다. 제가 대만 선교사로서 선교지 이곳저곳 다니기만 하다가 은퇴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만 전체를 대상으로 선교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중에 책을 쓰면서 문서사역을 하면 대만과 나아가 중국대륙까지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쓴 중국 책을 누가 보겠느냐’는 생각에 한참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중국 사람도 정작 공자와 맹자의 글을 읽는 것을 어려워 한다는 점을 착안하였습니다. 그들의 글을 읽으려면 아직도 일일이 사전을 찾아야 하지요. 중국에서 널리 사용되는 성경 중에 백화성경이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평범한 문장으로 써졌지요. 그래서 간단하고 쉬운 주제로 책을 쓰자고 결심했습니다. 우선 세례문답을 쉬운 문장으로 된 소책자로 만들어 교회에 배포했습니다. 쉽고 짧은 세례문답인데,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많을 때는 몇 백 권씩 팔렸습니다.

이 책과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대만에 조직한 노회를 제2개혁파 장로회라고 했습니다. 제1개혁파 장로회는 CRC, OPC, KPC 교단이 연합해서 설립했지요. 그런데 대만장로교회에서 개혁파장로교회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단이라고 했어요. 대만장로교회는 칼빈보다는 칼 바르트를 좋아하고, 민진당 정치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진보적인 교단이었어요. 대만에서 1,100개 교회를 가진 가장 큰 교단인데, 20개 교회가 되지 않는 우리를 이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대만장로교회에서는 제가 쓴 세례문답을 교재로 사용했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이 일이 있은 후에 더욱 힘을 내서 집필했습니다. 20년 동안 10권의 주석, 6권의 신학서를 썼습니다. 20년간 16권이면 평균 일년 반이 못되어 한 권씩 출판한 셈이지요. 이 일로 저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본국 교회에서 기도해 주시니까 이뤄진 것이지요. 한편에서는 선교사가 방구석에서 책만 쓰고 있다는 질책도 들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집필하는 시간은 주로 새벽이었습니다. 낮에는 손님이 많이 오는데, 모두 성의껏 접대했습니다. 그리고 급행열차로 세 시간, 버스로 한 시간 반을 가야 하는 교회를 비롯하여 여러 교회를 돌보고 사역했습니다. 그리고 책은 주로 새벽에 썼습니다. 하나님이 새벽 두 세 시에 깨우셨지요. 그때 눈을 떠 기도하고 집필할 수 있었습니다. 집필뿐 아니라 편집과 교정까지도 제가 했으니 일이 참 많았지요. 여기 이상규 교수님도 책을 많이 써서 그 수고를 잘 아시지요?

김 연구원 : 유 목사님께서 2001년에 한국으로 돌아오셨으니 선교지에 28년간 계셨군요.

유 목사 : 김영진 목사님이 30년간 계셨으니, 저는 그보다는 오래있지 못했습니다. 제가 대만에 갈 때 나이가 마흔 셋이었습니다. 선교지에서는 영감이지요. 하지만 일흔까지 열심히 선교하면 되겠다는 마음으로 대만에 갔습니다. 선교 지원이 잘 이뤄지지 않아서 아홉 달 정도 본국에서 지원이 전혀 없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 때는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28년을 보냈습니다.

김 연구원 : 목사님 기억에 남는 교단 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유 목사 : 제가 감천에 있던 칼빈대학에서 배울 때, 박윤선 박사님께 배웠습니다. 박 박사님은 성경 주석에 열정이 있으셨지요. 그러면서도 어떤 본문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성경을 묵상하고 깊이 연구해서 의미를 찾으면 알려 달라고 하시더군요. 그런 겸손한 말씀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제가 선교할 때, 박윤선 목사님 내외분이 대만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주간 모셨습니다. 그때 사모님이 “요즘에도 고려파 사람들은 주일에 차 안 타지요?”하고 묻습니다. 저는 “아닙니다. 타고 다닙니다”고 했어요. 뼈있는 농담이었지요.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박 박사님 내외가 한국으로 돌아가신 후에 강의·설교 테이프를 많이 보내주셨습니다. 그 분은 말씀 연구의 대가이신데, 그분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요. 저도 그런 선교사, 그런 말씀의 사역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김 연구원 : 마지막으로 우리 교단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 텐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유 목사 : 저는 선교를 오랫동안 한 사람으로서 선교에 대한 문제는 현지 선교사가 제안하는 것을 최대한 수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선교 방침은 실제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현장에 있는 선교사의 의견이 최대한 수렴되어야 합니다. 사무실에 앉아서 이것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면 안 됩니다.

중국에서 신학 교재를 출판한 일이 있었습니다. 총회 교육부에서 쓴 성경연구 시리즈를 번역해서 중국에 보내자고 했어요. 저는 현지 상황을 고려해서 반대했지요. 그러나 제가 없을 때,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여 팔백 만 원 이상을 출자하여 우리 교단 교육부가 만든 책을 번역 인쇄하였지만, 현지인들은 자기들과 맞지 않다고 보지 않았지요. 출판 대금은 지불이 되었지만, 아무도 찾지 않으니 결국 재정적인 낭비만 했지요.

교단 선교부에서는 현지의 사정을 잘 아는 선교사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선교지의 상황을 잘 파악하는 것도 선교부에 도움이 되니까요. 선교사가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본국 선교부 목사들이 앉아서 이래라 저래라 하면 안 됩니다. 선교지에 고려파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지요. 고려파도 중요하지만 순수한 개혁주의 복음이 중요합니다. 서울, 부산에서 목회하던 방식을 선교지에 대입하면 안 됩니다. 선교사가 비록 잘 못한다고 보여도 믿고 맡겨두어야 합니다. 선교는 현지 선교사의 의견을 잘 듣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보지요.


✱약력

>> 한국

·1931년 10월 15일 경남 거제시 연초면

한내리 694번지

·1950년 9월 21일-1955년 3월 22일

종군 보병 카투사

·1965년 제20회 고려신학대학원 졸업

·1968년 경동노회(고신) 목사안수

·1972년 9월 제22회 총회가

대만선교사로 파송 결정

>> 대만

·1974년 1월 18일 선교지 대만에 부임

·1975년부터 7개 교회 개척

·1980년부터 중국어로 된 신학서 집필

(주석 10권, 신학일반 6권)

·1988년 美남가주신학교 명예신학박사

·1990년 대만에 중국개혁파신학교

창설 학생 약70명)

·1998년 중화민국 내무부 장관 외국인

공로상

·2001년 대만선교사 은퇴

>> 중국

·1990년부터 2012년 1월 까지 63회 출입

·1997년부터 Calvin Seminary 개설

(현재, 목사안수 25명, 3개 노회)

·1998년부터 중국에서 성경주석 인쇄

·2008년부터 고신대학교에서 중국인

신학생 대상, 현지어 신학과목 수업

·2012년 고신대학교 중국인 신학생

12명, 제2회 졸업

고신역사기념관, 고신역사연구소, 고신역사사료관 (31071) 충남 천안시 동남구 충절로 535-31(삼룡동) Tel. 041-560-1977 E-mail: kegori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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