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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보 원로와의 대화6 이금도 목사와의 대화

최고관리자 12-12-06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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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파는 고려파만이 가진 보화가 있습니다”

이상규 교수(전역사기념관장, 고신대) 

이금도 목사님은 현재 생존해 계시는 고신의 큰 어른이시다. 1923년 8월 16일 경상남도 의령에서 출생하신 이금도 목사님은 1959년 고려신학교를 제13회로 졸업하고 1961년 경남(법통)노회에서 목사 장립을 받은 후 1993년 11월 11일 마산제일문창교회에서 은퇴하기까지 오직 한 가지 일, 교회 건설에만 열중해 오셨다.

1949년 1월 함안 하기교회에서 조사(전도사)로 교역을 시작한 이래, 의령마산교회, 함안 구혜교회, 마산동광교회, 거창교회, 부산 삼일교회, 마산제일문창교회에서 시무하셨다.

이금도 목사님은 그 동안 교단의 여러 치리회와 기관에서도 봉사하셨다. 경남노회 회록서기로 10년 연속 시무했으며,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회록서기로 6년, 그 후에는 부총회장을 거쳐 1977년 제27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총회를 위해 봉사하셨다. 또 진주노회장, 부산노회장, 마산노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이사 혹은 감사, 총회헌법개정위원, 교단발전연구위원장 등 총회 여러 기관에서도 헌신했다.

특히 그는 1980년대 단군전 건립운동이 시작됐을 때 선두에 서서 이를 반대하고 단군신전건립 반대투쟁위원장으로서 교파를 초월하여 저지운동을 전개해 단군전 건립을 동을 중단시켰다. 이 일은 한국교회를 위한 그의 값진 봉사였다.

그가 시무하는 교회마다 교회당을 건축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일생동안 기도하는 목회자로 살았다. 기도에 의한 기도를 통한 목회를 강조해, 기도하는 목회자 상을 심어 주었다. 그는 1949년 1월 이래 45년간 시무했고, 은퇴 후 19년 도합 63년간 교역자로 지내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일해 오셨다. 현재는 경남 창원시 마산해원구 회원2동 629-5번지에 거주하고 계신다. 지난 8월 17일 자택으로 이금도 목사님을 찾아가 그의 삶의 여정을 들었다.

고신역사기념관(관장 이상규 박사)과 고신언론사는 고신교회의 역사와 신학, 그리고 신앙 전통과 관련된 각종 자료의 보존과 체계적인 관리가 고신교회의 신앙정신과 이념 계승을 위해 시급한 현안이라고 뜻을 모으고 ‘고신역사 보존 운동’을 함께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약속에 따라 본보는 매달 마지막 주간에 발행되는 신문에 ‘역사의 현장 속으로’를 기획특집으로 편집 제작합니다. 고신역사기념관과 협력해 고신교회 역사와 관련된 산 증인들의 생생한 증언들을 싣는 기획특집에 독자님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이상규 교수 : 목사님 오랜만입니다. 그 동안도 잘 지내셨지요? 제가 자주 찾아뵈어야 하는데 결례를 했습니다. 이렇게 건강하시니 참 좋습니다.

이금도 목사 : 아이고 이 목사님, 반갑고 감사합니다. 제가 이렇게 건강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이 목사를 만나는 것은 즐겁지만 내가 여러 가지로 부족한데 들을 이야기가 있겠습니까?

이 교수 : 저는 목사님 밑에서 전도사로 그리고 협동목사로 일한 일은 잊을 수 없고 목사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목사님은 고려파(이 목사님은 항상 고려파라는 용어를 사용하신다)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이 강하셨고, 신앙과 생활에 대한 지도가 분명했고 특히 목회는 기도라고 말씀하시면서 늘 강대상 밑에서 지내시던 모습이 제 마음에 늘 남아 있습니다.

이 목사 : 나 역시 그 때 이 목사가 있어서 힘이 되었지요. 사실 저는 고신의 제2세대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은 나만 살아 있어요. 최만술 목사나 김인규 목사, 전성도 목사님 같은 분이 다 가셨는데, 저가 바라는 것은 고신의 정신이 잘 계승되는 것이고, 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2010년 제60회 총회에서 특강하면서도 말했습니다만 역사편찬 위원회를 가동시켜서 고신정신이나 신앙체계를 세워가야 합니다. 잘 알려진 분들 외에도 부산 삼일교회 강루식 장로나, 남해 내삼교회 한덕례 집사, 제일문창교회 김말선 권사님 등과 같은 그런 분들도 있는데 이런 분들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그 분들의 신앙정신을 후세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요즘에 ‘고신창립주일’이라는 말을 하는데, 이 용어부터 잘못됐어요. 교단이라는 용어는 일제 잔재가 아닙니까? 이것은 총회 결의와도 다른 것입니다. ‘총회기념주일’로 해야 합니다. 우리 총회가 총회기념주일로 정하고 그 주간에는 전국 교회가 공동설교문으로 설교하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1차로 오병세 목사님이 ‘고신의 제사장직’이란 제목의 설교문을 전국에 배포하여 설교하게 한 일이 있지요. 교단이란 용어 말고도 성서, 성가대라는 잘못된 말도 쓰는데 성경, 찬양대로라고 고쳐 쓰는 것이 옳지요.

이 교수 : 얼마 전에 총회 기독교문화유적보전위원회에서 순교자를 배출한 교회를 순교자 기념교회로 지정한 일이 있는데, 사실 목사님께서 이런 취지를 이미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이 목사 : 그렇지요. 제가 2005년 10월 노회 때 마산노회에 순교자기념교회 지정을 건의하면서 5개 교회를 거명하고 지정이유를 문서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우리 총회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분외에도 우리가 연구하고 발굴해야 할 신앙유산이 많다는 점입니다. 경남지방에서 볼 때 최상림 목사님은 후손들이 재건교회로 가셨습니다만 높이 평가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서성희 전도사는 함안군 대산면 5개처 교회(하기, 구혜, 마산, 취무, 옥열)를 담임했던 전도사인데, 이분의 신앙지도로 5개처 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교회였습니다. 당시에는 지역교회 교역자나 영수들을 불러 신사참배 동의서에 서명하게 했는데, 동의서를 내면 신사참배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함안군 대산면의 5개처 교회는 서성희 전도사의 지도로 아무도 동의서를 내지 않았습니다. 일제는 서성희 전도사가 문제라고 판단하여 그를 끌고 가 구타하고 고문하여 거반 죽게 되었지요. 아들인 서완선 (후일)목사가 업고 집으로 왔는데 그 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때가 1942년 봄인데, 나도 그 장례식에 참석했기 때문에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서성희 전도사는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배격하도록 가르친 분이었습니다. 또 황철도 목사님도 의령마산 지역 교회에 큰 영향을 기친 어른이었습니다. 이런 분들에 대한 연구도 있어야 합니다.

이 교수 : 목사님은 지난 60여 년 동안 목회자로 살아 오셨는데, 우리 후배 목회자들에게 주실 말씀이 없을까요? 특히 목사님은 교회건축을 많이 하셨는데, 건축을 하셨다는 말은 담임목사로서 솔선해서 헌신하셨다는 뜻이겠지요.

이 목사 : 저는 1949년 1월 첫 주부터 조사로 교역을 시작했는데, 1년 후 6.25 동란이 일어나 피난과 군복무를 하고 1951년부터 모 교회인 의령마산교회에서 사역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李泰尙)는 장로였지요. 아버지는 40여 년간 새벽기도 한번 거르신 일이 없는 기도하는 장로님으로 소문나 있었는데,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셨지요. 그 후에 함안 구혜교회, 마산동광교회, 거창교회, 부산삼일교회, 마산의 제일문창교회 등에서 시무했습니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가는 곳 마다 교회당을 건축할 수 있었지요. 이 교수가 지적하대로 생활대책 생각하지 않고 다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바보일 수 있어요. 그러나 오늘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유는 다 하나님의 것이지요. 제가 목회하면서 건축 말고도 늘 염두에 둔 것이 교육입니다. 늘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강조했지요. 의령마산교회에서는 신애학원(信愛學園)을 설립하여 공부도 시키고 성경을 가르쳤는데, 이 학원이 지금은 지정중학교로 발전하고 있지요. 당시 교육이 절실했기 때문에 사람을 키우자는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구혜교회에서는 ‘계명성경학교’를 열어 50-60명에게 성경을 가르쳤지요. 삼일교회에 있을 때는 ‘삼일성경학교’를 열어 교육을 했는데, 그때 권용수 목사와 이상규 목사가 수고 많이 했지요. 저는 특별히 목회는 기도라고 생각해요. 목회는 학벌로 안 됩니다. 삼일교회 있을 때는 10개월 간 특별철야기도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기도하는 것은 주님 의지하는 것인데, 그것이 목회의 정도라고 믿고 지내왔습니다.

이 교수 : 그 동안 살아오시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영향을 받으셨겠지만 누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습니까?

이 목사 : 여러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특히 네 사람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저의 삶에 있어서 부모(李泰尙, 崔尙林)님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아버지를 통해 신앙을 전수 받았고 기도하는 신앙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가 의령마산교회 출신인데 유아세례 제1호입니다. 88년 전의 일이지요. 아버지는 저를 주의 종 만들려고 일평생 기도하셨는데, 그 부모님의 기도 덕분으로 목회자로 살고 오늘까지 은혜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또 한사람이 고 황철도(黃哲道) 목사님이신데, 그 어른은 본래 창원 중리 출신인데, 의령마산으로 이사 오셔서 일하셨습니다. 저의 아버지와는 친형제처럼 지내셨으니 우리 가정도 잘 아시고 저를 많이 사랑해 주셨지요. 황 목사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황 목사님은 저의 아버지의 추천으로 호주선교부의 미순회 전도사가 되셨고, 함안지역 교회를 순회하시면서 사역하셨기 때문에 그 분의 영향 하에서 성장했지요. 무엇보다도 황철도 목사님을 통해 곧은 신앙을 배웠습니다. 제가 마산동광교회에서 위임을 받게 되었을 때 집례자였던 송상석 목사님께서 권면 받고 싶은 분이 있으면 청하라 하여 황철도 목사님을 모셨습니다. 그 때 위임받는 저에게 3가지를 말씀하셨는데, 첫째는 최선을 다하라, 둘째는 교회를 부흥시켜라. 셋째는 후회 없는 목회를 하라고 권면했는데, 저는 마음에 새기고 지내왔습니다. 황 목사님은 애국 민족 사상도 강하신 분이었는데, ‘국혼가’도 그분께 배웠지요.

한상동 목사님도 저의 삶과 목회에 영향을 주신 분이지만 사적으로 접촉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고려신학교 졸업반 때 목회에 성공하려면 3가지를 유의해야 한다며, 첫째는 금전문제에 깨끗하고, 둘째는 이성문제에 깨끗하고, 셋째는 교회가 어려울 때는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고 처리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늘 기억하고 그렇게 목회해 왔습니다.

저에게 영향을 주신 또한 분이 박윤선 목사입니다. 고려신학교에서 그분의 가르침을 받았고 그 분의 설교와 삶을 배웠으니 저에게는 큰 스승이지요. 박 목사님은 저를 많이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제가 구혜교회 사무할 때인데, 박 목사님이 함안역전교회 집회를 했습니다. “가까이 오셨으니 작은 교회지만 저희 교회에도 한번 오셔서 설교를 해주십시오” 라고 부탁을 드렸더니 토요일 아침까지 집회하고 그 피곤하신 중에서도, 구혜교회에 오셔서 주일 아침과 저녁, 월요일 아침까지 집회하시고 가신 일이 있습니다. 그 때는 함안에서 대산면으로 가는 버스가 하루 한번 있을 때였는데 그런 불편도 감내하시고 와 주신 일을 잊지 못합니다. 한번은 박윤선 목사님이 마산 문창교회에 오셔서 집회할 때 광고시간에 동광교회 이금도 목사는 박윤선 목사님을 만나고 가라 하기에 집회 후에 박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시간이 늦었는데도 아무 말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지요.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라고 물었더니 “그저 이 목사가 보고 싶어서 오라 했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합동신학교 개학 부흥회 때도 여러 번 저를 청해 주었습니다. 신복윤 박사가 교장으로 박윤선 박사가 명예교장으로 계실 때 합동신학교 개학부흥회가 학교 근처 변화산 기도원에서 열렸는데, 제가 아침과 저녁집회를 맡았어요. 그런데 점심식사 후에 같이 기도하러 가자하여 산으로 가서 마주 앉아 기도했습니다. 오래 기도한 후 저녁 집회를 해야 하니 저더러 먼저 내려가라 하더군요. 그런데 저녁식사 때가 되어도 안 내려오시기에 제가 다시 산으로 갔더니 “벌써 저녁때가 되었느냐”며 놀라시더군요. 기도 많이 하신 어른인데, 그런 분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니 감사한 일이지요. 저도 일생동안 기도하고 기도를 강조하고 살았는데 이런 분들의 영향이라고 생각하지요. 박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얼마 전에 저는 그 때 미국에 있었는데, 저를 많이 찾았다고 하더군요. 이런 점을 보면 저를 많이 아껴주신 분이었지요. 귀국 후에 문상도 하고, 김명혁 박사가 교장으로 있을 때 합동신학교 집회에 가서 박 목사님의 묘지도 가보고 했지요. 그 때 제가 박 목사님을 회상하며 한편의 시를 썼습니다.

이 교수 : 오늘의 후세들에게 특별히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겠지요?

이 목사 : 앞에서도 말했지만 역사편찬위원회라 할까 그런 기구를 두고 고신의 신앙역사를 몇몇 사람들에게만 찾지 말고 아직 숨겨진 밝혀지지 않는 역사를 발굴해 내고 고신의 신앙정신을 잘 계승해가기를 부탁하고 싶어요. 고려파에는 고려파만이 가진 보화가 있습니다. 우리 것 버리고 세상 풍조 받아드릴 수 없고, 시대가 혼탁하고 교계가 혼란할수록 우리의 좋은 전통을 드러내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 위해 필요하다면 자기를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금도 목사의 약력

1931 전북 정읍 시태인 출생
1953 부산사범학교 졸업(6년),
1954-1956 초등학교 교사
1956-1963 충북 제천과 단양에서 산중전도
1963-1977 대구 남성, 성지, 침산제일교회 담임
1965 총회신학교 59회 졸업
1968 목사안수 (경북노회, 합동)
1978 이인재 목사 주선으로 가족과 미국 이민
1978-1984 코로라도 덴버 서머나교회 담임
1985-1998 캘리포니아 헤이워드, 성지교회 담임
1967-1978 대구신학교(대신대학) 강사
1985-2002 샌푸랜시스코기독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2,000 ‘정통주의 신학에서 본 칼 바르트신학’ 출간
2003- 현재 캘리포니아개혁신학대학교 교수



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역사신학 ksnews@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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