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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요약⑤

최고관리자 13-11-27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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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요약

 

요약/ 김흥식 연구원

 

5장 수난(受難) 길에 들어선 일제하의 교회

 

1876년 일본은 한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을 맺은 후 한국을 발판으로 동양을 제패하려는 의욕을 가지고, 기회가 포착되는 대로 그 목적 달성에 나서게 되었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되어 교회가 세워지고, 기독교인들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인생관과 폭넓은 세계관을 갖게 되고, 남다른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 강한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정신을 보였다. 이들은 밀려오는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길은 황실의 안녕이라 생각하고, 왕과 황태자의 생일을 맞이해서 각 교회가 연합축하 행사를 추진하고 기도회를 가졌다. 그리고 이 날에는 교회에 태극기를 달기도 했었다.

하지만 일제는 한국을 일본에 합병하기를 원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민비를 시해하면서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함으로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그해 장로회공의회는 길선주 장로의 발의에 따라, 그 해 11월 감사절 다음 날부터 일주일 동안 각 교회가 구국 기도회를 갖기로 하고 이를 시행하였다.

1907,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말미암아 고종이 양위하게 되었고, 을미조약이 체결되었다. 1910822일 한국은 일본에 식민지로 합병되어 수탈되고 말았다. 당시 일본이 가장 부담스러워 한 것이 기독교인들이고, 교회였다.

 

5.1. 105인 사건; 소위 데라우찌 총독 모살미수사건

일본은 한국을 강제 합병한 후 항일독립운동을 방지하고 제거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항일운동은 기독교계인사들이 중추를 이루고 있었는데, 신민회(新民會)도 그러하였다. 일본은 가장 긴급을 요하는 타도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첫 번째로 시행한 것이 105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유죄선고 받은 사람의 수가 105인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서북지방에 가장 유력한 세력을 일망타진하고 연루된 선교사들도 추방하기를 원했다. 이 사건은 당시 데라우찌 총독 아래에서 식민지 조선의 치안유지 총책임자인 아카시 겐지로의 날조된 사건이었다. 데라우찌가 19101227일 압록강 철교 낙성식에 참석할 때에 기독교인들이 그를 암살하려하였다는 것이었다. 아카시는 날조된 조사에서 선교사 윤산온(尹山溫, George S. McCune), 소안론(蘇安論, W. L. Swallen), 방위량(邦緯良, William N. Blair), 나부열(羅富悅, Stacy L. Roberts), 사락수(謝樂秀, Alfred M. Sharrocks)를 거명하였다. 이것은 기독교 세력을 꺾고, 선교사들을 추방하려는 것이었다. 191110월부터 체포된 수는 약 600명에 이르렀고, 몇 사람은 심문 중 세상을 떠났다. 1912628일 서울지법에서 123명이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이 중 유죄를 받은 사람은 105명이었다. 이 가운데 92명이 기독교이었고, 장로교인은 82명이었다. 재판 진행 가운데 이 사건이 날조임이 들어났으나, 잔인한 고문으로 인해 허위자백을 받아 유죄판결이 난 것이다. 서울복심법원에서 열린 2심에서 105명 가운데 99명이 무죄로 석방되고, 이승훈, 양기탁, 안태국, 유치호, 임치정 5명이 6년형을, 옥관빈이 5년형을 선고 받았는데, 1915년 천황대관식 특사로 풀려났다.

이 사건은 그동안 소원했던 선교사들과 한국교회와의 관계를 가깝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선교사들은 일제와 한국교회 사이에서 일해야 했는데, 어떤 선교사들은 친일입장에 서게 되어 한국교회와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선교사들과 한국교회를 연루시킴으로 선교사와 한국교회의 관계는 회복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은 민족사적 의의도 있지만 교회사적인 의미도 띄게 된 것이다. 이 사건 후에는 합일합병 전에 시작되었던 “100만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은 이를 “100만 군의 십자군병운동으로 오해하여 교계지도자들을 대거 검거하였다. 1911년 세례교인 46,934명이었는데, 1912년에는 53,008명으로 6,079명이 증가했는데 비해, 교인 총수는 144,261명에서 127,228명으로 17,023명이 줄어들게 된 것이다. 교회를 새로 찾는 이가 줄었지만 세례교인은 상당히 증가된 점에서 이미 믿는 사람들의 신앙은 환난 중에 더욱 강화된 것을 알 수 있다.

 

5.2. 한일합병(韓日合倂)에 대한 일본교회의 입장

성경은 교회가 하나라고 가르친다. 비록 나라와 민족의 구별과 독립적 실존을 인정하지만 보편적인 교회를 가르친다. 그러나 일본의 기독교는 이미 일제를 위해 변조된 종교가 되어 침략자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일본 교회 안에서 한국합병에 대한 이의(異議)는 제기되지 않았다. 일본교회의 지도자 우에무라는 1910827일 한일합병에 관하여, “한국, 마침내 제국의 판도에 합병되었다. 이것이 다 하나님에 의해서 작정되어 있음을 깨닫고라는 식으로 말했다. 당시 장로교회 장로로서 서울 고등법원 원장의 직책을 맡은 와다나베는 두 민족의 조화는 기독교에 의해서 제래(齊來)되어져야 한다. 나는 얼마 전 연동교회에 가서 설교하면서 에베소서 216절을 읽고 두 민족 사이의 심각한 간격을 메우는데 기독교인의 책임이 얼마나 중차대한가를 고조하였다.”고 하였다. 이들은 일본기독교회의 책임있는 지도자들로서 한국민의 일본화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더 나아가 일본기독교회는 조합교회를 앞세워 어용(御用) 사업을 하였다.조합교회는 1911년부터 1917년까지 한국전역에 145교회를 세워 12,670명의 교인을 두었다. 또한 서울에 한양교회를 세웠는데, 한국인 차학연과 유일선이 밀착되어 있다.

이러한 일본기독교회의 활동 가운데서 오직 무교회주의자인 우찌무라 만이 총독정치를 정면 공박했다는 사실은 일본에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5.3. 기독교학교와 교회에 대한 일제의 통제(統制)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맺고, 한국의 외교, 재정, 군사 분야 등에 고문정치를 강화, 식민지교육을 위한 기초작업에 착수하였다. 교육개혁안을 발표하여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중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개편하고, 수학 연한을 단축함으로써 우민화 정책을 쓰고, 일본어 교과서 편찬으로 조선인의 동화(同化)”정책에 주력하였다. 1906년 이또는 조선인의 일본화라는 공식 교육방침을 선언하였다. 당시 국권회복과 애국을 위한 민족 교육을 하던 사립학교들을 비문맹적학교라고 비하하였다. 일본은 사립학교, 기독교학교를 탄압하였다. 미국과의 우호적 관계를 위해서 기독교학교에 대해 직접적인 탄압은 잠시 유보했었다. 그러나 합방이후, 데라우찌 총독은 오만한 반 기독교적 인물로서 무단통치”(武斷統治)를 강행하였다. 그의 기독교교육 분해 정책으로 조선교육령을 시행, 교육을 탄압한 것이다.

장로교총회는 창립하면서 학무위원회를 두고, 선교사들은 선교교육연합회를 설립하여 교육을 감당하였는데, 일본에서는 예배의식과 성경교육 철폐를 요구하였다. 그것은 학교의 정체석을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20만명 중 4만명이 학령기에 있었는데, 그중 21천여명이 기독교계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총독부의 강경한 탄압에서 감리교와 장로교는 입장 차이를 보였다. 감리교의 헤이스(M.C. Harris) 감독은 학교교육을 전폐하기보다는 총독부의 시책에 순응하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그러나 장로교측에서는 총독부 시책에 반대하여 인가 신청을 하지 않았다. 일제는 공립학교 시설을 확충, 사립학교와 차별성을 두고, 사립 출신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 방법으로 기독교 정체성을 말살하고자 하였다.

또한 총독부는 포교규칙을 발표하여 교회를 통제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교회나 강설소를 설립할 때, 총독부에 신청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시련의 시기에도 소망을 잃지 않고 전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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