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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요약④

최고관리자 13-11-26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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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요약

 

요약/ 김흥식 연구원

 

4장 장로교회의 조직

 

4.1. 공의회 조직과 활동

한국에 처음 입국한 북장로교 선교사들인 알렌 부부, 언더우드(1889년에 결호), 헤론 부부(의료선교사)는 먼저 미국북장로회선교회를 조직하였다. 1889년에 빅토리아주 장로교에 속한 데이비스 목사가 내한하게 되자, 연합하여 장로회선교연합공의회”(The United Council of Presbyterian Missions)를 조직하였다. 하지만 이 공의회는 1890, 데이비스 목사가 부산에서 별세한 후, 자연 폐지되고 말았다. 1892, 남장로교회 선교사 6인이 내한하자 1893년 미국남북양장로회 선교회가 장로회 정치를 쓰는 선교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 공의회의 회원은 선교사들이었고, 그 목적은 조선 땅에 갱정교신경과 장로회정치를 사용하는 연합교회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권한에 관하여 이 공의회는 각기 소속 미슈운에 대하여 권고권만 있으나 교회가 장로회의 규칙대로 완전히 성립될 때까지는 전국교회에 대하여 전권으로 치리하는 상회가 되는 것이었다. 1981년 호주 장로교회가 내한하고, 1898, 캐나다 장로교회도 5인의 선교사가 입국하면서 이 공의회에 가담하게 되었다.

1900년에 모인 장로교 정치를 쓰는 선교공의회1901년부터 조선인 총대를 참가하게 하고 반은 영어를 사용하고, 반은 조선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1901년에는 조선어를 쓰는 회와 영어를 쓰는 회 둘로 나누어 모이는 조선야소교장로회공의회로 모이게 되었다. 조선어를 쓰는 회를 둔 중요한 목적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를 훈련시키자는 것이었다. 이 제도는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01년 첫 번째 모인 공의회는 장로 3, 조사 6인으로 조선 사람 9인과 선교사 25인이 참석하였다.

4.1.1. 조선어를 쓰는 공의회

1901, 흉년이 든 김포 지역을 돕기 위해 전국교회가 연보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교회공동체가 어려울 때 서로 돌보는 일을 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1902년에는 통계를 집계하였다. 1904, 감사일에 대한 문제와 조선언문을 사용하는 일을 토론하였다. 1905년에서는 전도위원회를 조직하는 등의 결정을 하였다.

 

4.1.2. 영어를 쓰는 공의회

1900, 피택된 장로는 평남의 김종섭, 황해의 서경조였다. 1901년에는 평남의 길선주, 방기창. 1902년에는 평북의 양전백. 1903년에는 평남의 주공삼, 정익로, 한석진, 황해의 최정엽, 조병직, 함경의 유태연, 경상의 심취명이 피택되었다. 그래서 1904년까지 장로의 수는 25명이었다. 그리고 1901년에 김종섭, 방기창을 선택하여 신학을 교수하게 하였다. 나아가 평안, 경성, 전라, 경상 공의회를 두고 한국장로위원들을 선택하였다. 그래서 1901년부터 1907년까지 각 공의회 위원이 당회위원을 선정하여 교회 일을 처리하였다.

1902년에는 신학생을 교육할 임시과정을 마련하였으며, 함경 공의회를 설립함으로서 다섯 개의 공의회가 조직되었다. 또한 조선갱정교회통칭(朝鮮更正敎會通稱)을 타교파와 연합하여 야소교회”(耶蘇敎會)로 하기로 하였다. 1901, 장로 1인 이상이 있는 지교회 12, 목사임직 자격이 있는 자가 3인 이상되면 조선자유예수교장로회를 설립하고, 이 노회에서 선교사도 회원권을 갖는다는 설립지침이 가결되어 선교사들은 본국 선교부에 조선자유장로회설립허락을 청원하기로 하였다.

1903, 각 선교부에 조선자유장로회 설립청원의 결과, 캐다나 장로교회와 호주 장로교회 선교국은 허락을 하였으나, 미 남 북 장로교회 선교국으로부터는 확답을 받지 못했다. 또한 성경번역을 위해 대한성서공회가 질의한 것에 대해서는 성경을 언문(諺文)으로 출판하고 국한문(國漢文)으로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답하였다. 이는 개신교가 처음부터 서민 중심의 선교를 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1904, 헌법과 규칙을 처음으로 채용하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5천부를 간행하기로 하였다. 각 지방 공의회 위원을 폐지하고, 공의회소회를 설립하여, 각 지방에 당회가 이루어지지 않은 교회를 합당한 분에게 매년 당회권을 주어 돌아보게 하고, 언문으로 기록한 회록을 만들게 했다. 이 소회는 목사후보생을 시취하고 보호 양성하기로 하였다. 1904년부터 신학생을 평양으로 모이게 하여 교수하기로 결정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언더우드, 남장로교 전위렴(全緯廉, W.M. Junkin), 캐나다장로교회 부두일(富斗一, W.R. Foote)을 교사로 정해서 평양으로 오게 하여 교수하게 했다. 결과 미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가 함께하여 신학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혼문제에 관하여 음행(淫行)만 이유가 될 수 있음을 결정하였다.

1905, 장로 피택시, 투표자의 3분의 2를 얻어야 할 것을 가결하고 국한문신약을 발간하기로 하였다. 전국 장로회와 감리회가 친목하기 위해 총공의회를 설립하게 된 사실을 인준하였다. 그리고 각 선교회의 본국 선교국으로부터 조선 연합자유장로회설립이 허락되어 1907, “조선예수교장로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노회 조직하는 날에 조선 목사를 장립하고 그 목사는 전도목사로 장립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공의회는 12신조를 채택하였다.

1906, 다음해에 조직할 조선예수교장로회를 위해 관심을 기울였다. 노회가 조직된 후에 조선어공의회는 폐지하고 노회 총대원은 목사, 장로로만 허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정치모범은 적용하기 어려워 간단한 정치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1907년 노회가 조직되면서 공의회가 주관하던 사무는 노회로 돌리기로 하였다.

1907년 노회가 조직되기 전, 영어를 쓰는 공의회는 모두 노회에 치리권과 업무를 위임하고, 영어공의회는 일부 사건만 처리하고, 평양의 신학교, “전국장로회신학교를 담당하기로 하였다.

 

4.2. 독노회(獨老會)의 조직

1907, 917일 오전 9, 조선전국독노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배유진 목사가 기도, 성찬식을 거행하고, 마포삼열 목사가 네 선교회의 소속 총회로부터 얻은 권리대로 예수교장로회노회를 창설한다 선언하고 기도함으로써 개회했다. 당시 참석 인원은 선교사 33, 한국인 36인이었다. 36인의 지역 비율을 살펴보면 서북인 23, 함경 2, 호남 2, 영남 5, 서울 4명이다. 당시 총회에 보고된 교세는 장로 53, 조사 131, 예배처소 984개처, 세례교인 17,890, 원입교인 21,482, 교회에 출석하는 전체 수가 69,098명이었으며 학교는 402개교였다. 선교 23년 밖에 되지 않는 한국교회의 경이로운 성장이었다.

개회 첫날 밤 730분 한국최초 목사장립이 이뤄졌다. 마포삼열 목사가 성경을 읽고, 시취에 합격한 신학사 7명 서경조, 한석진, 송린서, 양전백,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을 호명하고 장립할 것을 선언한 후, 안수하여 목사로 장립하였다. 기일 목사와 이눌서 목사의 권면이 있었다. 권면은 첫 목사를 장립할부터 이어진 한국교회의 전통이 되었다. 그리고 목사로 장립된 서경조의 축도로 마쳤다.

독노회의 중요한 결정은 먼저 대한장로회 신경(12신조)과 정치를 일년 채용하기로 하고 연구위원을 내어 내년 노회에 보고하기로 했다. 허순길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교회의 신경으로 채용하지 않고 간단한 12신조를 채용하게 된 것은 한국교회가 아직 그 내용을 다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결과 한국장로교회는 다른 교파와의 관계에 있어서 정체성이 뚜렷한 개혁주의 교회로 성장해오지 못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해방이 될 때까지 12신조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의 교리참고서로 생각할 뿐이었고,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허순길은 1905년 장교로와 감리교의 양 선교사들로 이루어진 선교회 총공의회가 조선에 하나의 그리스도교회를 세우기로 합의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알미니안주의 노선의 감리교에 걸림이 되어 교회일치에 장애가 될 것으로 염려하여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취하지 않았을 것이라 추론한다. 독노회는 전도위원회를 설치하고, 제주에 선교사를 보내기로 결의하고 이기풍 목사를 파송하였다. 제주도는 한국임에도 당시 상황에 제주도는 다른 나라처럼 외진 곳이고,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비용은 각교회가 연보하여 부담하기로 하였다. 공의회를 통해 자립, 자치, 자전의 교회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후 독노회는 제주도 선교에 후속조치를 취하였고, 러시아, 일본, 북간도와 서간도에도 전도목사를 파송하였다. 독노회의 최대관심사는 선교였다.

 

4.3. 장로교 총회의 조직

1911년 대구 남문안 교회에서 모인 제5회 독노회는 다음해인 1912년에 총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7대리회를 7노회로 승격시켜 북평안, 남평안, 화애, 경기충청, 남북전라, 남북경상, 남북함경 일곱 노회를 조직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91291, 여성경학원에서 역사적인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가 제1회로 모이게 되었다. 당시 회원은 목사 96(선교사44, 목사52), 장로 125, 모두 221명이었다. 그리고 임원으로는 회장 언더우드, 부회장 길선주, 서기 한석직, 부서기 김필수, 회계 방위량, 부회계 김석창을 선임되었다. 총회는 중요한 안건으로 외국선교를 하기로 결의함으로 독노회를 조직할 때와 같이 선교교회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노회를 시작할 때에 제주에 선교사를 보내므로 신령한 교회를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도리므로 우리에게 기쁨이 충만한 바이온즉, 지금 총회를 시작할 때에도 외국전도를 시작하되, 중국(지나, 支那)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를 청원한 것이다. 총회는 중국 내양현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하고, 매년 감사일은 외국전도를 위하는 날로 정하고, 연보하여 선교비에 충당하기로 했다.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목사를 선교사로 임명하여 중국에 파송하였다. 총회는 만국장로회연합총회미국 남장로교회총회에서 온 문안과 축사편지를 낭독하기도 하였다. 노회가 총회에 보고한 내용은 각 지역에서 교회의 권징이 철저하게 시행되어 교회의 성경생활이 크게 강조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북평안노회는 노회 내의 세례교인수가 11,072명이었는데 혼인규칙 위반, 간음, 잡기, 불법으로 책벌 303, 해벌 150, 출교한 교인이 47명에 이르는 점이다.

하지만 총회의 어두운 점도 있었다. 당시 한일합병후 2주기가 되는 해로서, 총회장 언더우드 목사는 설교에서 미래의 고난을 예견하면서 겟세마네 동산과 같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예수님을 생각하게 하였다. 그런데 명치천황이 서거로 국장이 준비되고 있었는데, 총회는 각노회에 목사 1, 장로 1인 총 14명을 택해 국장요배식절차에 따르는 위원을 택하기를 가결하였다. 허순길 박사는 이 사건에 대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처지에 있지만, 이 땅의 교회가 총회로 출발하면서 바로 2년전 나라를 강탈한 천황의 국장을 위해 공식위원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힘들다. 총회는 출발지점에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하는 개혁주의 교회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총회는 폐회 직전, “회장과 서기가 총회로 모인 것을 총독부에 통지케 하기를 동의, 가결하기도 하였다. 출발하는 총회가 일제 앞에 지나치게 조심한 것이다.

 

4.4 교회일치운동

1905년 여름, 장로회·감리회 선교사들이 감리교 선교사 번커(D.A. Bunker)의 집에 기도회로 모여, 한국내 모든 기독교 세력의 일치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되었다. 당시 장로교는 이 일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장로교는 서울장로회일치위원회”(The Seoul Presbyterian Committee on Union)를 조직하였고, 이어 장로회 감리교 선교사들은 대한개신교복음주의선교총공희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하였다. 장로회 감리회가 조직한 이 공의회에서는 선교활동의 협력과 단 하나의 원주민 복음주의 교회의 조직이라는 목적을 채택하였다. 장로교의 공의회는 자주적 한국 장로교 조직에 관심을 가졌으나, 교파의 구별이나 장로교의 정체성에 관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고 폭넓은 복음주의로 만족했던 것이다.

서울의 장로회 감리회 선교회에 속한 교회들은 함께 모여 연합예배를 드리고, 양편 선교사들은 강단을 교류하였다. 총공의회를 통하여 1905년부터 선교지를 조정, 분할하는 일에 착수, 1909년 이를 마무리하였다. 주일학교 공과도 함께 발행하고 잡지도 함께 내기도 하였는데, 개혁주의 신학과 교리를 파수하는 일에 힘을 쏟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교지 조정으로 인해, 장로교인은 감리교인이되고, 감리교인은 장로교인이 되었다. 이런 형편에서 장로교나 감리교냐는 별 의미가 없었다. 선교사들은 교리 차이를 보지 않았고, 교파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들의 단일교회 이상은 역사를 간과한 매우 감상적인 것이었다. 대륙의 칼빈주의 개혁교회는 1618-19년에 도르트(Dortecht)에서 모인 국제회의에서 아르미니안 교리를 오류로 단정하고 지속적인 개혁을 해 왔다. 1643년 런던에서 모인 웨스트민스터 신학자 대회도 아르미니안 교리를 거절한 돌트 신경 내용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속에 포괄적으로 받아 들였다. 하지만 감리교는 아르미니안 교리를 추종해 왔다. 그러니 당시 장로교 감리교 교회 통합 부산은 미래 개혁주의 한국장로교회 미래에 있어서 다행스런 일이었다.

본국 교회에서는 이런 연합체제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별히 북장로교보다 더 보수적 경향이 있는 남장로교회는 이 단일 교회운동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남장로교 선교본부는 이들이 하나의 교회를 이룩하겠다는 생각이 엉뚱한데 놀랐다. 그 새 교회의 신경, 예배규범은 어떤 것이 된다는 말인가? 여기 미국에서 현재 가지고 있는 감리교회와 장로교의 차이는 어떻게 하고, 교리운운한단 말인가?”고 하였다. 그렇지만 본국 교회 선교부의 부정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한국 선교사들은 단일 교회를 이루기 위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러나 차츰 선교사들 가운데서도 강한 반대 의견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국교회 가운데서도 반대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결과 1911재한 개신교복음주의선교회총공의회는 그 명칭을 재한 개신교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The Fed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로 고쳐, 단일교회 추구보다는 상호협력과 교제를 주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단일교회 설립은 한국교회 자체에 맡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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