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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요약③

최고관리자 13-01-31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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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요약

 

요약/ 김흥식 연구원

 

31907년 오순절적 성령의 역사(대부흥)

 

한국선교는 한국이 역사상 가장 큰 정치적 문화적 변화를 겪고 있던 시기에 시작되었다. 일본은 청국, 러시아의 세력을 꺾고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계획을 하나하나 이루어가고 있었다. 당시 한국은 이런 환경을 겪고 있었지만, 스스로 대처할만한 역량을 갖지 못하고 당하기만 하는 형편에 있었다. 이런 절망에 때에 용기를 주고 미래의 소망을 갖게 해 준 곳이 교회였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얻으며 보호를 받기 위해 교회를 바라보고 찾게 되었다.

 

3.1. 오순절적 대역사의 발단

1907년 평양에서 오순절적 성령의 대역사가 일어났다. 이 사건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1903년 원산 창전교회에서 일주일간 매일밤 모이는 선교사들의 기도회가 있었다. 당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복음주의라는 기반 위에서 초교파적인 집회를 갖는 일에 거리낌을 느끼지 않았다. 이 때, 캐나다인으로 남 감리교에 의해 파송을 받아 온 하디(R.A. Hardie, 1865-1949)가 큰 은혜를 받고, 선교사로서의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고 통회를 하게 되었다. 지난 3년간 강원도 일대에서 최선의 노력을 하였으나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거침없이 밝히고, 자신의 무능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리고 그는 사역에 실패한 원인이 한국인 앞에서 품어온 민족적인 우월감과 자만의 죄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이 고백과 참회는 본인에게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놀라운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거기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과 은혜를 주는 기회가 되었다. 다음해인 1904, 정월에 세 교파 교회가 연합 사경회를 갖게 되었다. 이 때, 캐나다 장로교의 롭(A.F. Robb, 1872-1935)특별한 은혜를 받아 여러 날 금식통회하며 길 위에서도 간구를 중단하지 않으므로 신자들은 비웃고, 불신자들은 술에 취한 사람이라고까지 불렀다.” 한 해를 지난 후 1905, 여름 제직 사경회에서 롭이 인도로 회개 애통하는 자가 많았고, 기이한 능력을 받은 자도 많았으며,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그 후 전국교회가 점차 부흥하고 발전해 가는 대 전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19068, 평양의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은 하디 선교사를 초청하고 부흥회를 개최하여 은혜를 받으며, 다음해 정월에 있을 사경회를 위해 기도하기로 약속했다. 이 해, 10월 존스톤(H.A. Johnstone) 목사가 인도하는 사경회에서 성령받기를 원하는 자는 일어서라고 했을 때, 길선주가 즉시 일어나 이 땅에도 성령이 장차 강림하리라고 하였다.

 

3.2. 오순절적 성령의 역사

190716()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선교사들과 교회 제직들이 중심이된 사경회가 열렸다. 매년 초에 열린 사경회에서는 성경을 강해하고 배웠으며, 반을 나누어 축첩, 조혼, 음주, 흡연 문제 같은 사회윤리 문제를 다루고 토론하기도 하였다. 1907년의 사경회가 열리기 전, 선교사들은 매일 저녁 모여 기도하였다. 그리고 정월 2일 장로회반 모임 이후에는 정오에 기도하였다. 그라함 리 목사가 정오의 기도회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벧엘 그것이었다.”고 말한 것을 비루어, 그 기도회는 이들에게 좋은 은혜의 시간이었다.

정월 6일 밤 사경회가 시작되었다. 이미 부흥 설교가로 이름이 나있는 길선주 장로는 일찍부터 이 집회를 위한 새벽기도회를 인도해 왔다. 새벽기도는 그가 이미 1905년에 시작한 것으로 한국교회의 특수한 전통이 되었다. 이 부흥 사경회는 첫날부터 약 1500명의 신자들이 모여 자리가 부족하였다. 여자들은 교회당 밖에 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이 집회는 선교사들과 한국 교역자들이 인도하게 되었다. 이 집회가 민족적 비운을 맞는 시기에 열렸기 때문에, 모두들 큰 관심이 있었다. 성령의 은사를 받지 않고는 당면한 시련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설교를 맡은 길선주의 모습은 마치 광야에서 죄를 회개하라고 외치던 세례 요한의 모습과 같았다. 그가 맛을 잃은 말라빠진 사람들아라고 외쳤을 때, 회중들은 죄를 자복하고 통회하였다. 112일 토요일 밤, 사경회 엿새째, 북장로회 소속 방위량 목사가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는 설교를 하였다. 한 형제의 마음 속에 있는 미움은 전 교회에 해를 줄 뿐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을 보여주기 원했다. 설교 후에 많은 사람들이 죄를 알게 되었고, 사랑이 없었음을 고백하게 되었다. 서양인이나 한국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다음 날 주일 밤 회중은 신비스럼 경험을 했다. 온 교회가 영적 호흡을 느끼게 되었다. 114일 월요일 밤, 교회의 분위기가 달랐다. 교회에 들어설 때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함을 누구나 느끼게 되었다. 이를 느낀 것은 선교사들과 한국 사람들 모두였다. 이길함(Graham Lee) 목사가 설교한 뒤 모두 통성으로 기도하였다. 모두 마음을 같이하여 죄를 통회하였다. 앞다투어 죄를 고백하고 울음을 터트리며 마루바닥에 쓰러지고, 죄에 대한 고통을 참지 못해 주먹으로 마루를 쳤다. 형언할 수 없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집회는 고백과 애통과 기도로 밤 2시까지 계속되었다. 이 때, 회중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죄를 거의 다 고백했다. 사람의 체면은 이제 다 잊어버렸고, 국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든지 죽음을 당한다 해도 문제가 안되었다. 다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었다.

이 분위기는 집회 마지막 밤인 15일 화요일 밤에도 계속되었다. 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평양에 있는 학교와 전국으로 퍼져나가 6개월간 전국을 휩쓸게 되었다. 장대현 교회에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을 당시, 숭실대학은 방학중에 있었다. 그러나 방학 중의 학생 몇 명이 집회에 참석하여 놀라운 체험을 하였다. 개학이 가까워 학생들이 모이자 교수와 학생들은 매일 오후 네시에 모여 집회를 같게 되었다. 거기에서도 놀라운 성령의 역사와 자복의 통회가 일어났다. 2월에 개학하자 300여명의 학생들은 한 주간 수업을 제쳐놓고 성경공부와 기도, 밤에는 집회를 가져 자복 통회하는 놀라운 시간을 가졌다. 이 때 90퍼센트의 학생들이 변화를 받고 새사람이 되었다. 이런 성령의 역사는 이웃 감리교 학교에서도 일어났다.

평양에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전국 여러 곳에 나아가 계속되는 성령의 역사에 수종들었다. 서울의 승동교회는 길선주 장로를 초청하여 부흥집회를 가졌다. 이길함은 선천으로 소안론은 광주로, 한위렴은 대구로 가서 부흥운동에 수종들었다. 이 부흥의 열기는 중국에도 영향을 주었다. 중국 요양과 봉천에서 선교하던 장시정과 호만성 목사들이 1907년 평향 부흥회를 경험하고 돌아간 것이다. 이들은 이를 하나의 새로운 선교방법으로 인식하고 중국에서도 부흥을 위해 사경회 제도를 도입하였다.

 

3.3. 성령의 대역사 결과

이 대부흥은 오랜 교회역사를 갖지 않은 교회에서,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한 환경에서 일어났기에 비정상적인 현상이 일어날 염려가 있었다. 하지만 사경회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매우 건전한 것이었다.

첫째, 교회는 이를 통해 복음을 통한 성령 임재의 순수한 신앙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교회는 높은 영적 수준으로 올라갔고, 성경교육 덕분에 광신도적인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회개는 고백으로만 멎지 않고 새 사람된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신자들이 같은 믿는 사람에게뿐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불의로 취한 물건과 돈을 돌려주어 사회가 동요하게 되었다. 한 중국 상인은 신자가 갑자기 찾아와 몇 년 전에 부당하게 취한 상당액의 돈을 돌려주어 놀라기도 하였다.

둘째, 선교사들과 한국 신자들간에 이해가 증진되고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선교사들 중에 맥켄지 목사같이 한국사람들처럼 살다 간 분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백인 우월이식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인 가운데서도 양대인(洋大人)의식을 가지고 서양인들을 무조건 높여주고 추종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민족성, 풍속, 사고방식의 차이 등은 서로 이해를 가로막는 벽이 되었다. 그런데 이 때 성령의 역사를 함께 체험하고 회개하므로 양자간에 막힌 담이 헐리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서양인이나 한국인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백성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셋째, 성경공부와 기도의 생활이 더욱 강화된 것이다. 성경을 사랑하고 공부하는 것과 기도에 대한 열심은 일찍부터 자리잡은 한국교회의 특징이었다. 1907년의 대부흥 운동도 평양의 장로교회에 속한 남자들이 성경공부를 위해 모인 사경회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때를 계기로 거의 모든 신자들은 성경 공부하는 것을 신앙생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요소로 보고 오늘까지 계속해왔다. 또한 새벽기도회는 1905년에 이미 길선주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이 때부터 부흥회 때에만 아니라 매 주일 새벽에 하게되었고, 평일에도 신자들이 교회에 나와 기도하는 것이 영속적인 교회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넷째, 교회가 정치화(政治化)되는 길을 피할 수 있었다. 교회가 한국에 자리를 잡게 되던 해인 19세기 말은 나라가 국권을 상실해 가던 비운의 해였다. 당시 기독신자들은 불신자들보다 나라 사랑하는 뜨거움을 가졌다. 그래서 주일날 신자들은 집과 교회에 대나무 끝에 국기를 달아 세우고 그 날이 주의 날임을 알리면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고종황제가 일제의 힘에 밀려 양위했을 때 교인들은 매일 기도회를 열고 통곡하며 기도했다. 이 때문에 망국의 비운 속에 살던 많은 지식인들이 한 가닥 희망을 걸고 교회를 찾게 되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머물면서 교회를 반일 저항의 근거지를 삼으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선교사들의 입장은 매우 어려워졌다. 선교사들은 교회를 정치적인 운동의 근거지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게 되었다. 1901년 장로회 선교회 공의회는 정교분리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게 되었다.

 

우리 목사들은 대한 나라 일과 정부 일과 관원 일에 대하야 도모지 그 일에 간섭 아니하기를 작정할 것이요... 교회는 성신의 교회요 나라 일을 보는 교회 아닌데, 예배당이나 회당 사랑이나 교회 학당이나 교회 일을 위하여 쓸 집이요, 나라일 의논하는 집은 아니오, 그 집에서 나라 일을 공론하려 모일 것도 아니요. 또한 누구든지 교인이 외어서 다른데서 공론하지 못한 나라 일을 목사의 사랑에서 더욱 못할 것이요.”

 

이로 말미암아 선교사들과 교회와의 사이에 긴장관계가 생겨나게 되었다. 특별히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교회를 찾은 분들과 선교사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 적대관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 선교사들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영국과의 영일동맹(1902, 1905), 미국과 가츠라-테프트 밀약(1905)을 통해 일본의 입장을 지원하는 형편에 있었으니 선교사들의 입장은 정치적으로 난처한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있어서 교회란 정치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영적인 실체라는 것을 강조하고 이를 부각시키는 것이 최선이었다.

선교사들에게 난국을 헤어날 길은 영적인 부흥의 길 밖에 없었다. 평양 부흥은 이런 선교사들의 기도의 결과가 나타난 것이었다. 한국교회 신자들은 이제 시련의 때를 정치적인 힘과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의지하려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1907년의 부흥은 한국교회의 비정치화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대부흥 이후 제도적인 교회는 민족운동, 독립운동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으나,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의 일원으로서 개인적으로 이 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다섯째, 교세의 증가이다. 이 부흥은 먼저 신자들의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였고, 전도에 대해 열매를 맺게 하였다. 영적 활력을 얻은 신자들은 적극적으로 전도에 나서게 되었다. 사경회 때, 낮에는 성경공부를 하고, 밤에는 일반적으로 전도 목적의 집회를 가지므로 많은 불신자들을 초대하게 되었다. 낮 공부 후, 참석자들은 모두 흩어져 가가호호 방문하여 밤 집회에 초대했다. 이 해에 조직된 독노회는 전도국을 설치하여 적극적인 전도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교세는 놀라운 증가를 보였다. 1905년에 세례교인 11,061명 원입교인 8,431명이었는데 1907630일까지 통계는 세례교인 18,061, 원입교인 19,791명이었다. 그리고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의 총수는 1905년에 37,407명이었고, 19076월에는 72,968명으로 거의 배가 되었다.

여섯째, 한국장로교회가 조직되어 출발하기 직전 이런 성령의 큰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는 각기 본국 선교본부로부터 허락을 받아 1907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준비해 왔다. 이제 한국 장로교회는 말씀과 성령의 놀라운 역사의 체험을 기반으로 활력있는 교회로서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1907년 대부흥은 장로교회에서 일어난 것이었지만 특별히 감리교회와 같은 다른 교파 교회에도 파급되었다. 이 결과 부흥운동은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서로 더 가까워지게 되고, 연합과 협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개혁주의 장로교회가 한국에 터를 놓는 중요한 시기에 정체성을 갖는데 부정적인 것이었다. 부흥을 통한 주관적 신앙체험의 공유는 교회의 제도적 한계선을 넘어 서로 쉽게 수용하고 교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평양에서는 양 교회가 병원을 공동 운영하고 교육사업도 공동으로 하기로 하였다. 기독교회 공통 목적을 위한 교파상호간의 연합은 매우 바람직하지만 신앙고백적 면에서 교회의 정체성은 유지되어야 한다. 부흥운동적 교회로 정착하게 된 한국장로교회는 교리문제를 간과하고, 체험을 중시하는 교회로 성장하게 되어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지 못하였다. 이후 뛰어난 부흥사라면 교회와 상관없이 강사로 초청하게 되는 천통이 생긴 것이다. 이런 전통은 개혁주의 교회 건설에 유익이 되지 못한다.

 

3.4. 백만명 구령운동

1907년 대 부흥운동이 있은 지 얼마 안되어 뜨거웠던 영적 열기가 식어가고, 그 활력이 쇠잔해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때, 1909년 감리교 선교사들 사이에 전도운동이 일어나고, 9월에 모인 남 감리회 선교회 연회는 “20만명을 그리스도에게라는 표어를 채택하고 전도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연회 후에 곧 장로교 선교사들과 감리교 선교사들로 이루어진 개신교 복음주의 선교 총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가 모이게 되었는데 여기서 표어를 백만 명을 그리스도에게로 바뀌게 되었다. 당시 한국 기독신자들의 수가 20만이었다고 생각할 때, 백만명을 목표로 전도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매우 대담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 때, 선교사들은 일제의 국권강탈과 실의에 젖어 있는 한국인들의 정황을 고려하고 이런 대담한 전도 운동을 전개하려 한 것이다.

장로교는 19109월에야 공식적으로 전 교회가 이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당시 전도운동에 도입된 두 가지 특수한 방법은 상기할만하다. 한 방법은 날 연보”(day-offering)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자들이 전도를 위해서 시간을 연보하는 것이다. 이 제도는 큰 호응을 얻어 평양의 1천명의 신자는 연 22천 날을 바친 것이다. 이 전도 운동 1년 동안 날 연보가 10만일을 넘겼다. 또 다른 방법은 전도 문서를 반포하는 것이었다. 이 때처럼 많은 전도지와 쪽 복음을 널리 배포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더르난 결과가 많지 않았다. 목표했던 10분의 1에 그치고 말았다. 일년동안 3,790명이 증가한 144261명이었다. 이는 다른 때와 비교하였을 때, 매우 적은 증가였다. 한일합방으로 국권을 완전히 상실한 때인 1910년에 이 운동이 일어났으므로 밖으로부터는 이 구령운동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나중에 언급되는 105인 사건이 이러한 배경에서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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