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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보 원로와의 대화 박치덕 목사와의 대화

최고관리자 12-08-2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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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와의 대화/ 박치덕 목사와의 대화

 

박치덕 목사님

1926 경남 밀양 출생/유아세례(예원배 선교사 집례)

1946 입교(한상동 목사 집례)

1948 고려신학교 졸업

1952 고려신학교 본과 제6회 졸업/ 목사안수(총노회)

시무교회

1952. 6. - 1955. 9. 거제 장승포읍교회(현 염광교회) 위임목사

1957. 5. - 1959. 10. 경주교회 담임목사

1959 - 1963 제천교회 위임목사

1963 10. - 1967 . 3. 기장교회 위임목사

1967 - 1969 충무제일교회 위임목사

1969. 12. - 1974. 2. 범천교회

1974. 2. - 1986. 1. 서울중앙교회

1986. 3. - 1996. 12. 은강교회 위임목사

1996. 12. 27. 은퇴

- 현재 서울노회 공로목사

경력

부산 고려고등성경학교 전임강사

부산 고려신학대학 강사(설교학)

1990 총회 제40회 총회장

1990 총회 유지재단 이사장

1980 - 1983 학교 법인 이사

한국기독교교역자협의회 공동회장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공동회장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공동회장

 

하나님께서 나를 건져주셨지요.

 

박치덕 목사님은 고신 역사와 함께 살아온 교단의 큰 어른이시다. 192685일 경남 밀양(김해군과 마주보고 있는 낙동강변 지역)에서 출생하신 박 목사님은 그해 겨울 예원배(Albert wright) 선교사에게 유아세례를 받았고, 194610월에 한상동 목사께 입교문답을 받았다. 19487월 고려신학교 예과 과정을 마치고, 19524월 고려신학교 본과를 제6회로 졸업하고 19529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노회에서 목사로 장립되었다.

목사가 된 그는 거제 장승포읍교회, 경주교회, 제천교회, 기장교회, 충무제일교회, 범천교회, 서울중앙교회 그리고 은강교회 등에서 사역하였다.

그는 교단의 여러 치리회와 기관에서 봉사하셨다. 고려고등성경학교, 고려신학대학, 서울고려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셨고, 충북노회장(합동시), 경기노회장, 서울노회장과 총회 교육부장, 신학부장, 행정부장, 재판부장, 부회장, 총회장, 유지재단 이사장, 학교법인 이사를 역임했다. 또 한국기독교교역자 협의회 공동의장,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공동회장,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공동회장, 교회와 경찰중앙위원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셨다.

박치덕 목사님은 26세의 나이로 목사로 장립된 후 19961227일 정년은퇴 하기까지 44년간 목회했다. 21세 때부터 전도사로 사역한 것까지 합한다면 반세기 동안 교역자로 봉사하신 것이다. 그는 50년이란 긴 교역 생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불충불의하고 교회 앞에서 실수한 부끄러운 일이 많다고 겸손해 하신다.

박치덕 목사님은 인터뷰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찾아뵙지 못하던 중 지난 9월 교단 총회에서 박재영 목사님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고 그의 따님인 고 박성아 성도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그의 유품도 기증받게 되었다.

1956912일에 출생한 고 박성아 성도는 20091218일 소천했는데, 진행성 근육위축증이라는 희귀병으로 일생을 누워 지냈다. 비록 손과 팔에 힘이 없는 상태였으나, 성경을 필사하겠다는 의지로 신구약성경을 필사하였다. 보행은 물론 앉아 있을 수도 없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모든 것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부모, 형제들을 격려하여 일생을 살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을 위해 모은 일천 만원을 신대원 학생을 위한 장학금으로 기부하기도 하였다. (김흥식 연구원/ 고신역사연구소)

 

김흥식 연구원: 목사님, 사모님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금번 기증을 기회로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박치덕 목사: 제가 감기가 걸려서 목소리가 좋지 못합니다. 멀리서 만나러 오셨는데 죄송합니다.

 

김 연구원: 박 목사님의 가정 배경을 말씀해 주십시오.

박 목사: 저는 192685일 김해군과 마주보는 낙동강변인 밀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출생한 당시에는 생활에 여유가 있었지만 선친(박수민 장로)께서 전도를 받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대략 1900년 초창기라고 생각되는데 그때 예수 믿는다고 받은 핍박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선친은 일제 강점기에 한학자셨습니다. 그 당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지요. 농토는 전부 몰수되고 가문과 동리에서는 배척을 받아 눈물겨운 생활을 했습니다. 끼니도 정상적으로 이어 가기가 힘들었어요. 어머님께서는 그 시절을 회고하실 때마다 눈물 지우곤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하나님의 은혜와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약종상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나중에는 잃었던 농토를 도로 찾을 뿐 아니라 더 많은 전답을 소유하게 되어 부농이라 할 만큼 되었습니다. 시련을 참고 견디면 욥과 같이 나중이 창대하게 되는 체험을 한 셈입니다.

 

김 연구원: 선친이신 고 박수민 장로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박 목사: 신앙이 철저한 분이었지요. 선친께서는 일제가 요구하는 다른 것들은 부득이 시행하고 심지어 성을 바꾸는 굴욕적인 창씨개명도 진리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응했지만, 신앙에 저촉되는 세 가지 즉 동방요배와 신사참배는 우상 숭배라고 거부했고 황국신민서사도 거부하셨습니다. 선친이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일제의 정책에 반대하다가 한상동 목사님을 만났고, 이후 같이 경찰서에 다니며 많은 고초를 당했지요. 한 목사님이 밀양마산교회에 시무할 때, 선친이 그 교회 장로였습니다. 선친께서는 한 목사님과 함께 경찰서 끌려 다녀며 곤욕을 치르다 고막이 파열되어 별세하실 때까지 잘 듣지 못하셨습니다.

 

김 연구원: 목사님 가정이 가문과 동리에서 배척받으셨고, 일제 강점기에는 믿음을 지키시는 일로 목사님 가정이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박 목사: 일본이 일으킨 소위 대동아 전쟁이라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최후의 발악을 했지요. 수탈 정책으로 식량도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빼앗아 가고, 각종 쇠붙이는 밥그릇에서부터 예배당 종까지 거두어 가고 우리말과 글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성과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지 않았습니까. 나중에는 자식들마저 징병, 징용, 정신대로 끌고 갔지요. 더욱이 한민족인 우리들에게 일본 백성임을 서약하는 황국신민서사라는 것을 외우도록 하고 일본 귀신들과 역대 천왕의 혼령을 모셨다는 신사에 참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김 연구원: 박 목사님께서 고려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이야기를 들려주시지요?

박 목사: 저는 고려신학교를 6회로 졸업하였습니다. 사실, 이근삼 박사, 오병세 박사와 같이 입학했습니다. 일제 강점 말기, 사상범으로 일본 해군에 끌려갔었습니다. 형무소에서 14개월 수감하고 난 후 건강상의 이유로 한 해 쉬고, 늦게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1946년 입학하여 1952년에 졸업하였습니다.

 

김 연구원: 목사님께서 밀양에서 지내실 때 시점은 어떠했습니까?

박 목사: 마산에서 약간 떨어진 밀양 외산이라는 곳에서 10년간 마산교회를 다녔습니다. 현재는 오산교회로 개명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밀양에는 안 믿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믿는 사람들도 신사참배에 굴복했습니다. 당시 밀양에는 교세가 그리 강하지는 못했어요.

 

김 연구원: 목사님의 가정배경과 성장 과정이 궁금합니다. 과연 그 어려운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박 목사: 그 당시 누님과 저, 동생 세 사람이 각각 6학년, 4학년, 1학년이었습니다. 모두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거부하다가 퇴학 처분을 당하게 되었는데 누님은 마산에 있는 의신학교에, 나는 창신 학교에 각각 편입하여 6학년인 누님은 다음해 봄에 졸업을 할 수 없었고 나는 그 후에 창신학교도 신사참배를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어 자퇴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저는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가 없어서 전국 각지의 학숙(學宿, 요즘의 학원)을 전전하면서 중학과정(그 당시 고등학교가 없고 5년제 중학 과정이었음)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돕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군 당국과 경찰서에서 나온 사람들에 의해서 지원이라고는 하지만 반 강제로 일본 해군 해병단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훈련을 받고 있던 어느 날 헌병대에서 나온 사람들이 훈련 도중에 나를 데리고 가서 사상 동지의 이름을 말하라고 고문을 했습니다. 2개월간을 시달리다가 어이없게도 2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일본 사세호에 있는 해군 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후에 알아보니 나와 같이 훈련을 받던 장정들은 훈련을 마치고 남양군도에 배치를 받고 가는 도중에 미군 잠수함의 공격으로 죽기도 하고 현지에 도착해서 죽기도 하고 남태평양의 여러 섬에서 전멸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나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죄수라는 신분으로 일본에 피신을 시키신 것이었어요. 이후 14개월 동안 사상범으로 독방에 갇혀 있던 중, 연합군의 승리로 8·15 해방이 되어 풀려 나오게 되었는데 여기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섭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세호가 군항으로 해군 기지였기 때문에 연일 계속되는 미 공군의 폭격으로 군사시설은 말 할 것도 없고 민간 시설까지 산산조각으로 파괴되었는데 언덕 위의 예배당과 내가 갇혀 있던 해군 형무소만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징역형 언도를 받고 진해에서 해군 수송선을 타고 일본으로 가던 그 시기도 현해탄 일대에 미 잠수함이 깔려 있어서 배들이 빈번히 격침되던 때였는데도 무사했어요. 아주 어릴 때에도 물에 빠져 죽게 된 것을 지나가던 사람이 건저 낸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아는 죽음의 고비만 해도 네 번이나 있었는데 그때마다 하나님은 나를 건져 주셨습니다. 해방이 되자 뼈와 가죽만 남았지만 살아서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붙들어 주셨기 때문이지요.

 

김 연구원: 박 목사님께서는 이후 어떻게 목사님이 되셨나요?

박 목사: 해방된 조국에서 나의 삶의 방향을 정해야 하는데 여러 길이 있었습니다. 교도관으로 갈 수도 있고 창설되는 해군에 입대하는 길도 있었고, 다른 친구들처럼 대학으로 가서 학문의 기반을 닦는 길도 있었지요. 하지만 죄에서 나를 구원해 주실 뿐 아니라 육의 생명도 몇 차례나 죽음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가장 옳은 길인 줄 알고 1년간 건강을 회복한 후 19469월에 출옥 성도들이 뜻을 모아 개교한 고려신학교 예과에 응시하여 겨우 합격이 되어 목회자의 길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6·25동란이라는 민족의 대혼란도 있었고 교회는 교회대로 신사참배의 후유증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었지만 195249일에 고려신학교 본과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 9월에 우리 교단 제1회 총회인 총노회에서 강도사 고시에 합격하고 그 당시 전도사로 시무 중인 장승포읍교회(, 염광교회)의 위임 목사 청빙에 의해서 목사 안수를 받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김 연구원: 박 목사님께서 사역 기간 중에 기억에 남는 일화를 듣고 싶습니다.

박 목사: 목사가 되기 전, 어린 전도사로 모교회인 밀양 외산교회를 섬길 때 일이예요. 그때는 교회의 제직이 거의 모두가 나의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선친께서는 장로로 시무하셨고 어머님이 집사(그 시절에는 권사제도가 없었음), 둘째 형님 내외가 집사(맡형 박손혁 목사는 창원군 대산면 갈전교회를 시무 중이었음), 셋째 형님 내외가 집사, 누님이 집사, 외삼촌 내외가 집사, 가족이 아닌 집사 두 분이 있었는데 이들은 누님의 시어른들이시나 제직회라고 열어 놓으면 동의 제청 가결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마치 가족회의처럼 중구난방이었어요. 어떤 경우에는 회장인 나를 보고 얘야 그건 그런 것이 아니고 이런 거란다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건에 대해서 의견을 물으면 그런 것은 네가 알아서 할 것이지 묻고 있는가라고 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호칭 문제도 그 당시 전도사를 조사라고 불렀는데 조사가 아이 이름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심부름을 시키는 경우 얘 조사야! 너 좀 갔다 오너라하는 식이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한 번은 어머님 앞에서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어머님 나를 부르실 때는 이름을 부르시든지 조사라고 부를 때는 조사님!’하고 존칭을 붙여야 합니다고 했더니 어머님은 즉시 수긍하시고 그 때부터 언제나 존칭을 붙이셨습니다. 목사가 된 후에 내가 어디 나갔다 들어오면 얘들아! 목사님 오신다. 진지 차리도록 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같이 교회를 섬긴 여전도사 김장수 전도사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연세도 거의 30년이나 연장자이지만 마치 어머니처럼 나를 지도해주셨습니다. 설교를 하고 나면 언제나 잘했다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실수와 잘못이 있을 경우에는 지혜롭고 조심스럽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이후에 천국 올라가 만나고 싶은 분들 중에 한 분이십니다.

 

김 연구원: 목사님께서 고신 교회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어떤 내용인가요?

박 목사: 회개운동, 말씀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일 성수를 강조해야 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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